|울산의대 본과 4학년 김은영| 무슨 과 할 거니? 라는 질문을 안 받아본 의대생이 있을까?
우리에게 이 질문은 너무나도 익숙한 질문이고 서로 흔히 주고받는 질문이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꼭 진심이 아니더라도 모범답안처럼 한 개 준비해서 다니곤 한다. 그런데 나는 이 질문에 반기를 들고 싶다.
의대생이 아닌 친구들과 장래에 관하여 얘기 나눌 때, ‘나중에 뭐 하고 살 거야? 어떻게 살고 싶어?’ 이렇게 묻지 ‘너 회사 무슨 부서 갈 거야?’ 이렇게 묻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의대생들은 병원에 남아서 전공의가 되는 것이 전제되어 무슨 과를 할 것인지를 묻는다.
물론 전공의 과정을 밟고 과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한 결정이고 큰 갈림길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게 우리 모두의 최종 목표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본과 4학년이 되어 졸업을 앞둔 지금에 와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까지 뭘 위해서 이렇게 달려온 걸까? 매일 밀려들어 오는 지식들과, 매주 찾아오는 시험들을 하나둘씩 이겨내며 5년의 세월이 흘렀다.
나는 국제 보건을 해서 더 적절하게 의료 배분을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해왔으나, 경험을 해보기는커녕 경험담을 들어보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이쪽으로 꿈을 꾸려고 해도 두려움과 망설임이 앞서게 되었고, 포기하기에는 마음의 미련이 많이 남았다.
포기하더라도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알고 포기하고 싶어서 졸업하고 바로 인턴을 하거나 학생 시절 잠시 휴학을 하는 일명 정규코스에서 벗어나 방황을 해보려고 했다. 내가 꿈꾸는 일이니 내가 시도하면 그만이지만, 길을 잃지는 않을까 후회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교수님과 선배들에게 기회가 될 때마다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한결같이 부정적이었다.
‘의사 연봉이 얼마인 줄 아느냐, 네가 방황하는 1년 동안 그만큼의 가치를 만들 수 있겠냐.’, ‘안정적으로 병원 생활하는 친구들이 부럽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네가 쉬고 싶지 않아도 쉬게 될 날이 온다.’, ‘남들은 다 하는데 너만 쉬고 왔다고 끈기없는 애로 보일 수 있다.’ 등등.
모두 나를 위해서 한 말이었지만, 그래서 나에게는 더 크고 무거운 돌이 되어 돌아왔다. 내가 뭔가를 벗어나 도전하려면 정말 그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할 것 같았고,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꿈을 찾고 방황하고 싶다는 말이 사실은 쉬고 싶다는 말을 돌려 말하고 있었던 건가 나를 의심하게 되기도 했다. 사실 아직도 확신은 없다. 당장 내년에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달라진다.
그렇지만, 나는 나에게 다짐했다.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길이면 가보자고. 가서 후회해도 좋고, 실패해도 좋고, 결국 포기해도 좋다고. 그게 내 연봉에, 내 승진에, 내 평가에 손해를 끼칠지 몰라도, 나 스스로와 한발 더 가까워지고, 한발 더 나아가는 길이 될 거라고.
혼자 고민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날 동기 한 명에게 이런 생각을 넋두리처럼 늘어놓았다. 그러자 그 친구는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너보다 너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 아직 여린 생각을 괜히 남들에게 말해서 상처받게 두지 말고, 네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면 꼭 해봐. 그러고 나서 아니면 다시 돌아와서 같이 인턴, 레지던트 하면 되지.’ 무심한 듯 얘기해준 말이 그렇게 위로가 될 수가 없었다.
다음에 만나면 서로에게 무슨 과 할거냐 물으며 선을 긋지 말고, 어떤 의사가 되고 싶은지 또는 나중에 뭐하고 싶은지 물어보자. 처음 들어보는 질문이라서 당황하는 친구도, 사실 속으로 많이 고민하고 있어서 누군가와 얘기가 너무 하고 싶던 친구도, 자기가 품고 있던 꿈을 막 풀어놓는 친구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도 한 번 더 물어보자.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고 어떤 의사가 될 것인지 말이다. 그러면서 생기는 마음속 말들을 너무 외면하지 말자.
마음속의 빈 곳이 작은 대화, 작은 문장으로 채워질 수 있도록 조금 더 자유로운 대화가 오갈 수 있기를 살며시 바라본다. 내가 스스로 하는 확신으로는 조금 부족했던 부분이 동기의 한마디로 채워졌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의대생이기 이전에 청년인 것을 잊지 말자. 꿈을 꾸고, 방황하고, 나의 삶을 찾는 청년. 나를 포함한 모든 청년의사의 도전과 방황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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