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디칼타임즈=문성호 기자]수억 원을 호가하는 글로벌 항암제와 초고가 혁신 신약이 속속 개발되고 있지만, 정작 국내 중증 환자들에게 이 약들은 식약처 허가를 받더라도 실질적인 건강보험 급여 등재까지 기나긴 공백기가 소요되는 탓에 그림의 떡일 뿐이다.
당장 내일의 생명이 위태로운 말기 암 환자들에게 이 시간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으며, 국가는 기다리라 하고 약값은 감당할 수 없는 절망 속에서 환자들이 목숨을 걸고 찾아오르는 첫 번째 사다리가 바로 허가 전 임상시험이다.
좁아지는 문… "중국으로까지 가야 하나"
신약이 정식 허가를 받기 전 환자들에게 가장 먼저 혁신 치료제를 투여해 볼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통로인 임상시험은, 특히 항암 분야에서 비용 부담 없이 최첨단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현장 전문의들이 입을 모아 강조하는 마지막 생명의 줄이다.
돈이 있어도 사서 맞을 수 없는 초고가 신약을 무상으로 투여받고 암세포가 줄어드는 경험은 환자들에게 재기의 희망 그 자체이지만, 진입 문턱이 높고 정해진 슬롯이 한정돼 있어 혜택을 누리는 환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이 냉혹한 진실이다.
이 허가 전 임상시험의 문턱이 이처럼 바늘구멍인 이유는 단순한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국내 보건의료 규제와 글로벌 제약사들의 전략적 투자 회수 사이의 인과관계에서 비롯된다.
실제로 지난 2022년 3월 4기 비소세포폐암 진단을 받은 A씨의 투병 기록은 이 구조적 모순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축소판이다. 당시 면역항암제인 키트루다(펨브롤리주맙, MSD)로 첫 번째 생명줄을 잡았으나 불과 10개월 만인 2023년 1월 내성이 찾아왔고, 정식 급여 의약품을 기대할 수 없는 공백 속에서 환자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글로벌 제약사의 임상시험실뿐이었다.
결국 2023년 3월 신약 후보 물질과 세포독성항암제를 병용하는 첫 번째 임상시험에 참여했으나 9개월 만에 내성이라는 벽에 부딪혔고, 그해 12월 곧바로 두 번째 임상시험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하지만 국내 임상 문이 턱없이 좁아지면서 A씨와 가족들은 치료 기회를 찾아 "차라리 임상 인프라가 한창 발전 중인 중국으로까지 건너가야 하나"라는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이후 A씨는 치료 기회를 찾아 해외로 눈을 돌려야 할지 고민하다 2024년 5월 뇌전이가 발생해 감마나이프 시술을 받고 같은 해 9월 두 번째 임상마저 실패한 뒤 케모포트를 심은 채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해 끝내 눈을 감았다.
이러한 환자 가족의 절체절명한 고민은 객관적인 거시 지표로도 완벽히 증명된다. 국가임상시험지원재단 자료에 따르면,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체의 3상(Phase 3) 임상 실시기관 수는 2024년 6597건에서 2025년 5144건으로 1년 만에 1453건이나 급감하며 전체적인 아시아 볼륨이 쪼그라들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거대 자본과 막대한 환자군, 정부의 전폭적인 규제 완화를 업은 중국은 글로벌 임상 허브로 거세게 부상하며 파이프라인을 공격적으로 흡수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글로벌 신약 허가의 명운을 가르는 핵심 3상 임상시험 분야에서 북미 지역(2025년 기준 7875건으로 전 세계 1위) 등 서구권에 밀리고, 중국과의 경쟁에서도 밀려나며 배정 쿼터가 가파르게 축소되는 악순환에 빠졌다.
분당차병원 전홍재 교수(혈액종양내과)는 "글로벌 제약사들이 한국에 배정하는 쿼터와 임상 슬롯을 전반적으로 많이 줄이고 있다는 것이 현장의 공통된 평가"라며 "미국이나 유럽 등 서구권이나 급부상하는 중국 쪽으로 핵심 임상을 더 몰아주는 추세이며, 상대적으로 식약처의 규제가 까다롭고 건보 등재 협상이 보수적인 한국은 글로벌 제약사들의 투자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제약사 입장에서는 한국에서 임상을 진행해 데이터를 확보하더라도 이후 보수적인 허가 및 약가 협상 난항에 부딪힐 바에는 한국 시장을 포기하고 본토나 중국으로 발길을 돌리게 되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들에게 돌아오는 형국이다.
FDA '라손큐' 승인… 국내 임상 인프라 허상과 한계
이 같은 구조적 딜레마는 폐암을 넘어 다른 난치암 영역으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최근 췌장암 4기 진단을 받고 전신 전이가 진행된 60대 중반 남성 환자 B씨의 사례 역시 허가 전 임상시험의 한계를 보여준다. B씨는 유전자 검사 결과 'Kras G12D' 돌연변이가 확인돼, 최근 주목받고 있는 차세대 RAS 억제제 신약 후보 물질인 '세티데그라십(ASP3082)'의 제1상 임상시험에 올라탔다.

다만, 이 과정에서 환자와 보호자는 전이성 췌장암 게임체인저로 최근 FDA 허가를 받은 '라손큐(다락손라십)'를 두고서 깊이 고민했다.
글로벌 임상 3상에서 표준요법 대비 사망 위험을 획기적으로 낮추는 혁신적 성과를 입증하면서, 식약처 승인 등을 거쳐 국내에서도 서울대병원, 세브란스병원 등 일부 대형병원을 중심으로 'RASolute 303' 연구(전이성 췌장 선암종 환자의 1차 치료로서 라손큐 단독 또는 병용요법을 비교하는 제3상 글로벌, 다기관, 공개라벨, 무작위배정, 3개군 시험)가 가동되는 등 환우 사회에는 국내 관련 임상 슬롯이 열릴 것이란 실낱같은 희망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글로벌 대형 다국적 3상 임상이 국내 일부 병원에서 진행된다 하더라도, 정작 대다수 일반 환자들이 마주한 현실은 여전히 냉혹한 문턱에 가로막혀 있다.
단적으로 글로벌 스탠다드와 국내 현실 사이의 괴리는 일선 대형병원 임상시험에서 드러난다. 일선 주치의인 교수들조차 글로벌 제약사가 본사 가이드라인에 맞춰 하달한 복잡한 임상시험 계획서(Protocol)를 환자에게 설명하고 제안하는 통로 역할에 머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수억 원대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는 중증 환자들에게 약값을 무상으로 아낄 수 있다는 점은 임상시험이 가진 절대적 장점이지만, 모든 과정이 장밋빛인 것은 아니다.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박병규 교수(소화기내과)는 임상 참여를 두고 "컨디션이 좋은 일부 환자들이 대형병원 임상에 진입해 기회를 얻고 있지만, 약물 투여 순서나 기존 표준치료와의 우열 등 임상적으로 아직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은 변수들이 존재한다"며 "환자나 가족들의 기대가 매우 크지만 무조건적인 환상보다는 면밀한 임상적 유효성을 따져봐야 한다"고 냉철하게 조언했다.

실제로 국내 의료기관에서 진행 중인 관련 신약 임상들은 라손큐처럼 미국 등지에서 주도하는 글로벌 3상 트랙이 국내로 들어올 길이 요원하여 그림의 떡인 경우가 많고, 혹여나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진입 문턱이 매우 높고 슬롯이 극히 한정된 치료 단계에 편중돼 있다는 평가다.
라손큐 임상연구에 참여 중인 한 종양내과 교수는 "저 역시 1차 치료 임상을 진행하고 있지만, 여기에 진입하는 소수의 환자들은 그나마 행운을 잡는 것"이라며 "2차, 3차 치료제로 넘어가는 레이터 라인(Later-line)의 글로벌 신약들은 아예 한국에 들어오지도 못한다. 등록이 까다롭고 필수적인 1차 치료나 극히 귀한 연구들만 겨우 남는 식"이라고 말했다.
그는 "결국 미국 같은 곳은 환자도 많고 시장도 크니까 본토에서 대부분 소화해 버리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은 그 혜택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처럼 글로벌 제약사들이 국내의 보수적인 급여 체계와 턱막힌 규제 장벽에 가로막혀 발길을 돌리고 임상 투자를 줄여나가는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국가 차원의 전폭적인 임상시험 투자 확대와 제도적 유연성 확보가 해법이라는 지적이다.
서울의 한 상급종합병원 혈액내과 교수는 "우리나라의 임상시험의 최대 장점이 환자 인롤(Enroll) 등 빠르게 진행된다는 측면이었는데 이 점마저 이제는 상쇄된 것 같다"며 "글로벌 본사가 공식적으로 말하진 않지만, 이제는 한국의 수익성이나 급여 환경이 녹록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그는 "임상 연구도 제약사 입장에서는 하나의 '기회'인데, 연구는 한국에서 실컷 하고 정작 약은 안 써주는(급여가 안 되는) 상황이 반복되니, 차라리 시장이 더 큰 곳에 기회를 몰아주겠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며 "임상시험이 국가 제도 공백이 아닌 지원의 영역으로 전환해야 할 시점"이라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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