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수술을 마치고 갱의실에서 간단한 샤워를 마친 후 환자가 옮겨진 중환자실로 걸어가는 짧은 순간에 나는 많은 생각을 한다.
수술 방에서 최선을 다했는지, 환자는 의식을 회복할 것인지, 수술에 시간을 뺏기는 동안 병실에 입원하고 계신 환자분들은 별 탈이 없었는지, 응급실에 새로운 환자가 오신 것은 아닌지, 하물며 굶은 끼니는 어떻게 때울까 등등….
오늘도 수술을 마치고 나오니 밤 11시가 다 되었고, 병원은 낮의 분주함을 모두 삼키고 잠든 듯 고요하기만 했다. 지치고 피곤해 그냥 침대에 쓰러지고 싶은 욕망을 한 순간에 날려버리는 동료들이 있는 곳, 중환자실에 다다랐다.
조용하지만 눈과 귀를 항상 곤두세워야만 오히려 마음이 편한 곳, 그곳이 신경외과 중환자실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들과 전혀 다를 바 없었던 이 분들은 망할 놈의(나는 솔직히 다소 격하고 불경스러운 이런 단어만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는 데 언제나 동감한다) 뇌질환 때문에 환자라는 새로운 직함을 받은 채 자신의 모든 것을 디지털로 표현되는 숫자 몇 개(혈압, 맥박, 체온, 혼수지표 등)와 몇 명의 의사, 간호사들의 눈과 귀와 머리에 의존한다는 사실에 나는 항상 안타까움을 느낀다.
신경외과 중환자실은 의식과 신경장애를 평가해야 하므로 긴장감 그 자체가 생활이 되어버린 팀원들이 근무하는 공간이다. 매일, 매시간 긴장하고, 부닥치고, 고민하고, 해결하는 동안 긴장감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 근무하는 공간이다.
나는 오늘 그런 공간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들었다.
환자 홍길동님은 급작스런 뇌부종으로 오늘 응급수술을 받으셨다. 모든 응급수술이 그렇듯이 선택수술에 비해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수술이므로, 수술의 결정, 진행, 수술 후 경과관찰에 긴장도가 배로 요구된다. 특히 수술을 마치고 난 당일은 마취와 수술 후 스트레스로부터 시시각각 예측에서 벗어나거나 혹은 예기치 않은 합병증으로 악화일로의 기로에 서 있는 순간이므로 팀원들이 초미의 관심을 집중하는 시간이다.
홍길동님도 중증 뇌부종으로 인한 수술 후 경과회복이 더디던 차라, 집도의인 나는 더욱
신경이 쓰이던 분이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중환자실에서 수술기록을 작성하고 있는 시간은 마침 간호팀원들의 인계시간이었다. 간호팀원들의 인계는 군대 교대 근무식 뺨칠 정도로 군기가 세다. 그리 길지도 않은 시간인데 어떻게들 엄하게 인계를 하는지, 그리고 쉴 새 없이 인계되는 그 많은 정보를 언제 다 외워버리는지 막상 인계가 끝나고 나면 투입 팀은 근무를 마친 퇴근 팀 뺨칠 정도로 환자를 전부 파악하고 있다. 나는 언제 봐도 이 인계가 참으로 신기하기만 하다.
도상작전과 같은 인계업무를 마치면, 투입 팀은 머리에 입력된 자료를 재평가하고 이중 체크하기 위해 환자 침대를 일일이 순회하면서 간단한 문진 및 이학적 검사 등을 시행하게 되고 이때 인계 및 보고된 자료가 완벽한 지, 인계하는 동안 새로 변동사항이 생긴 것은 없는지 두 번, 세 번 확인 하는 절차를 거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울려 퍼진 것은 바로 그 때였다.
홍길동님은 수술 직후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의식 회복속도도 여느 환자처럼 신속하지 못했고 활력징후도 불안정했다. 그런데, 아마 의식이 회복징후를 보인다고 인계를 마쳤는 지 4명의 투입 팀이 홍길동님 침대 양 옆에 서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홍길동님, 내 말 들려요?”“홍길동님, 내 말 들리면 손잡아 봐요.”
“제 손 꽉 잡아 봐요.”“홍길동님, 내가 누구예요?”
불과 몇 초만 참으면 한 사람씩 순서대로 말할 수 있고, 듣는 환자도 더 잘 이해가 될 것 같은데, 그 순간을 못 참겠는지 혹은 자기가 가장 먼저 환자 의식 회복의 순간을 확인하고 싶어서인지 이들 4명의 투입 팀은 신경외과 중환자실 구석에서도 다 들릴 정도로 각자의 독특한 음성으로 동시에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소리가 내 귀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들리고 있었고 수술의 완벽한 마무리를 향한 외침으로 들렸으며 우리 신경외과 팀의 포효로 들렸다. 콘서트에도 클라이막스가 있듯이 오늘의 클라이막스는“선생님, 약간 오베이(obey : 지시에 따를 수 있을 정도의 의식회복)되는 것 같아요.”라고 했다. 나는 이런 멋진 콘서트에 기립박수를 쳐주지는 못할망정 힘없는 미소로 화답하고 말았으니 정말 큰 빚을 진 셈이 되어버렸다.
나는 신경외과가 좋다고 말하고 싶다. 아니 좋아야 한다. 그러나 극도의 피곤함으로 인해 집중력이 떨어질 때나, 환자의 치료경과가 내가 예상하고 바라는 바와 어긋나고 있을 때나, 정확한 출퇴근 시간을 가짐으로써 시간안배를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복 받은(?) 직장인이 부러워질 때나 아니 이들 보다 더한 그 어떤 때 일지라도 나를 제자리로, 긴장감이 팽배한 공간으로 데려다 주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신경외과 팀원들이다.
오늘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바로 내 직장에서 들었다. 그들이 있기에 나는 마음 놓고 내일 또 수술 방으로, 외래로, 병실로 향할 것이다. 또 다른 레퍼토리의 아름다운 소리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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