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 조정법을 잘 활용하면 되지 굳이 의료사고 조정법이라는 게 필요합니까? 비슷한 법을 또 하나 만드는 것은 옥상옥이 아니라 옥하옥입니다. 법 만드는 것보다 신뢰를 얻는 게 더 중요하죠."
1988년 대한의사협회가 국회에 의료사고처리 특례법 제정을 처음으로 건의했을 때, 당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추호경 입법심의관은 이같이 말하며 '의료분쟁조정법' 제정을 강하게 반대했다.
23년 후인 2011년. '의료사고 피해 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고 이 법을 근거로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 탄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20여년 전 법 제정을 강하게 반대했던 추호경 입법심의관이 초대 원장으로 임명됐다.
"23년 동안 보건의료 분야와 인연을 맺을 기회가 많았습니다. 보건의료 전담 검사였고, 보건대학원에서 공부했습니다. 사법연수원에서 의료과오 손해배상을 가르쳤고, 대한병원협회 법률고문을 맡기도 했습니다. 환자 편에 서서 의료소송을 승소로 이끈 경험도 있습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아온 경험이 모두 의료중재원장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하 의료중재원) 추호경 원장(68)은 31일 서울스퀘어에서 열린 전문기자협의회 간담회에서 다사다난했던 의료중재원장으로서의 3년 임기를 마무리하며 '처음'을 회상했다.
그는 "취임 초기에는 속된 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다. 초대 원장이라 각종 규정과 업무 매뉴얼 등을 만들면서 이 제도가 잘 시행될 것인가 걱정도 많았다. 삶의 큰 줄기가 의료중재원 초대 원장으로 집약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인 만큼 3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의료계에 느꼈던 아쉬움을 토해냈다.
"초기 일부 의료단체는 의료중재원의 조정 절차에 절대 참여하지 말라는 공문을 발송하고 회원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는데 사실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의료계 내부에서 이해관계가 엇갈려 전체적으로 하나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의료계를 이끈다는 일부 인사들의 사고는 너무 경직돼 있어 안타깝습니다."
그리고는 의료계에 '단합'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덧붙였다.
"전문분야, 의료기관이나 근무 형태, 세대, 출신 대학 등을 뛰어넘어 대승적으로 단합된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이 의료계의 제일 시급한 과제라고 봅니다. 또 지도자는 조직 구성원에게 실질적으로 이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고 이끌어야 합니다."
추 원장은 의료계의 불만이 클수록 환자와 의사의 '신뢰 쌓기'에 집중했다. 그 결과 조정개시율이 2012년 38.6%에서 2014년 48.9%까지 높아졌다. 조정성립률은 90% 이상이다.
산부인과 의사들의 맹렬한 반대를 불러왔던 '불가항력 의료사고 보상재원 분담금'에 대한 해결책도 내놨다.
"불가항력 의료사고 보상 제도에 대한 반감은 크게 남아 있지만 산부인과 의사들을 옥죄고 진료 의욕을 꺾는다는 이유로 제도 자체를 없애버리기에는 매우 유용한 제도입니다. 환자 측의 물리적 실력 행사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죠."
"분만의료기관협의체에서 자율적으로 보상 기금을 형성해 산부인과 의사들 스스로 기금을 운용하도록 하는 방식이 올바르다고 봅니다. 기금 액수의 2배 또는 3배 식으로 국가가 국고로 보조를 해주면 됩니다"며 "여러 장점이 있는 제도이므로 개선책을 차차 생각해봐야 합니다."
다음 달 9일이면 초대 의료중재원장으로서의 일정을 모두 마무리 짓는 추호경 원장.
앞으로도 역사가 계속될 의료중재원은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까지 실현하는 치유적 사법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했다.
"준사법기관으로서 옳고 그름만 정확히 판단한다고 해서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 없죠. 법원이 사법적 정의를 구현하는 곳이라면 의료중재원은 회복적 정의까지 실현해야 합니다. 환자와 의료인 모두를 따뜻하게 보듬어 의료분쟁으로 받은 상처를 깨끗이 낫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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