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개발은 대표적인 고위험, 고수익 분야다. 투자 시간, 금액과 상관없이 신약 개발은 여전히 불확실성의 영역이다. 신약 개발 성공이 시장에서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반면 최근 IBM의 인공지능 왓슨이 의료 영역에서의 활용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제약바이오협회가 (가칭)인공지능 신약개발 지원센터 건립을 확정하는 등 제약산업에서의 인공지능 활용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인공지능이 신약 개발을 촉진시킬 것이란 장미빛 전망뿐 아니라 인간의 일자리가 줄어들 수 있다는 우울한 전망이 혼재돼 있는 상황.
인공지능이 신약 개발 환경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산업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인공지능 전문가를 만나 AI의 신약 후보 물질 발굴 원리와 국내외 적용 사례, 일자리 대체 가능성 등을 물었다.
▲인공지능에 눈 돌리는 제약사들
글로벌 제약 업계에서 신약 연구개발 투자 규모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신약 연구개발 비용은 2015년 1498억 달러에서 연평균 2.8%씩 증가해 2022년 경에는 1820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신약 허가 건당 연구개발 비용은 평균 24억 달러에 달한다.
신약 개발까지는 평균 5000여 개 이상의 후보 물질 중 단 5개만이 임상에 진입하고 그 중 하나만이 신약으로 판매 허가를 받는다. 유력 후보 물질의 제품화가 이미 상당수 진행되면서 신약 개발 실패 위험도는 점차 증가 추세다.
FDA 허가를 위해 소요되는 임상 기간이 1990년에서 1994년 동안 평균 4.6년에 불과했지만 2005년에서 2009년까지는 7.1년으로 늘어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문제는 신약 개발 성공과 투자 규모, 기간이 비례 관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랜 시간, 대규모 투자를 통해서도 신약 개발에 실패할 수 있고, 신약 개발에 성공해도 시장에서의 상업적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발생한다.
쉽게 말해 신약 개발과 같은 고위험, 고수익 분야는 불확실성을 줄이는 것이 바로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길이라는 뜻이다.
▲다국적 제약사, 인공지능 활용 활발…국내는?
제약사가 인공지능에 눈을 돌리게 된 근본 원인은 신약개발 과정에서 효율성을 높여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한 노력과 맞닿아 있다.
신약 연구개발 기간 동안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초기 연구개발에서의 방대한 데이터를 취합하고 분석하는 효율성 제고가 곧 연구개발의 지속성을 높이는 길. 이런 가능성을 먼저 주목한 것은 다국적 제약사들이다.
인공지능 도입 현황을 보면 ▲존슨앤존슨 베네볼렌드AI(Benevolent AI) ▲화이자 IBM 왓슨 ▲산텐 twoxar ▲머크 아톰와이즈(atomwise) ▲노바티스 인실리코 메디신(INSILICO MEDICINE)이 신약 개발에 활용되고 있다.
존슨앤존슨은 Benevolent AI와 새로운 임상 단계 약물 후보물질에 대한 독점 라이센스를 체결했다. 여기에 활용된 인공지능 기술은 신약 개발의 효율성 제고와 보다 나은 표적 선택, 화합물 최적화, 생물학적 개체와 비정형 문헌 간의 수 억 개의 연관성을 분석하는 데 쓰인다.
화이자는 왓슨을 도입해 면역 항암제 신약개발 착수했다. 인공지능을 활용해 다양한 정보의 연결분석과 객관적인 가설을 수립한다. 특히 편향되지 않은 과학적인 근거에 기반해 가설을 세운다는 것이 장점으로 꼽힌다.
산텐의 twoxar는 duma라는 인공지능 신약탐색 플랫폼을 사용해 녹내장 신약을 개발한다. 후보물질 탐색에 쓰이는 머크의 아톰와이즈는 3D로 약물 설계를 하는 최초의 인공지능이다.
일본 제약기업 역시 IT 기업 50곳과 손을 잡고 신약개발용 전문 AI 공동 개발에 착수했다.
가천대 길병원은 인실리코 메디신을 통해 노화 신약을 개발, 연구하면서 공공 및 민간 의약품 빅데이터를 수집, 정리, 표준화 후 플랫폼 적재까지 활용하고 있지만 대다수 국내 제약사의 인공지능 도입은 미온적.
매출액 기준 상위 10개 국내 제약사의 경우도 아직 인공지능 도입은 이뤄지지 않았다.
배영우 제약협회 전문위원(전 IBM 고객기술자문 상무)는 "덩치가 큰 제약사의 경우도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만 있을 뿐 실제 적용은 아직 없다"며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지만 초기 도입 비용 때문에 주저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매출이 1조가 넘는 제약사라고 해도 글로벌 기준으로 보면 작은 규모"라며 "10%를 R&D 비용으로 쓴다면 1000억원에 불과해 인공지능 툴 도입이 후순위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인공지능의 신약 후보 물질 발굴 원리는?
신약 후보 물질 도출을 위해선 "특정 병에 어떤 물질이 작용해서 효과가 있을 것"이란 가정을 해야 한다.
병에 대한 증상, 병에 대한 유전자, 병에 대한 실험과 물질 후보들 작용 상관 관계, 병에 대한 기존 치료제까지 다양한 정보가 존재한다. 신약 후보 물질이 기존에 없었던 약물인지를 찾고 기존 공개돼 있는 유전자 관련 정보, 증상, 치료 경과, 임상 시험과 관련된 것을 총 망라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현재 제약사가 운용하는 검색 엔진은 사람이 직접 학술논문에서 관심 분야나 키워드를 통해 검색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방식이다. 문헌 조사에는 운용자의 경험이나 관심 분야에 따라 편향성의 위험이 내재한다. 게다가 1만에서 5천여 후보 물질 중 10여개 내외의 유력 후보 물질로 추리는 과정 자체가 인력, 비용 싸움이 된다.
반면 왓슨과 같은 인공지능은 자연어 방식으로 데이터를 처리한다. 쉽게 말해 자연어로 된 문서를 읽어 지식을 축적, 가공, 데이터베이스화 한다. 실제로 왓슨은 2011년 2억 페이지의 문서를 읽은 후 TV퀴즈쇼에 나가 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배영우 제약협회 전문위원은 "TV퀴즈쇼에서 보여준 능력과 비슷하게 신약 개발에 사용되는 왓슨 역시 자연어에 기반해 학술논문에서 신약 후보물질 가설을 세운다"며 "입력된 자료에서 독성, 유전, 생물학, 의료정보를 모두 망라해서 문헌 조사를 하고 편향되지 않은 추론 결과를 내놓기 때문에 인력으로 하기 힘든 문헌조사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음은 화학 구조식의 시뮬레이션 분야다.
신약을 3차원으로 분자 시뮬레이션을 해 어떤 기능을 할 지 미리 추론해 보는 영역이다.
배 위원은 "미국의 바이오벤처 아톰와이즈(atomwise)는 아톰넷이라는 인공지능 시스템을 개발했다"며 "특징적으로는 3차원 구조를 만들어서 분자 결합 가능성 등을 시뮬레이션 할 수 있다는 점이다"고 밝혔다.
그는 "화학 구조식에 관련된 시뮬레이션 했을 때 어떤 분자와 결합해서 어떤 작용할 것인지 미리 알아 볼 수 있다"며 "신약의 동물 실험 전에 인공지능을 사용해 많은 가지 수를 대폭 줄이면서 가능성 높인 것을 도출하는 원리"라고 설명했다.
▲인공지능의 인력 대체 가능성은?
벌써부터 제약업계는 인공지능을 활용한 신약개발이 업계 표준 모델이 될 것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모 제약사 관계자는 "사실 지금 제약사가 사용하는 논문 검색 툴은 인간이 직접 키워드를 넣고 자료를 수집해야 하는 원시적인 수준이다"며 "구글 검색엔진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밝혔다.
그는 "문헌 조사에 인력, 비용, 시간 소요가 큰 만큼 신약개발의 투자 비용 절약을 위해 문헌 조사에 인공지능 활용이 보편화될 수밖에 없다"며 "인공지능 도입 제약사의 결과물이 가시화되는 시점부터 도입이 활발해 질 것이다"고 전망했다.
회원사를 상대로 인공지능 센터 수요 조사에 나선 제약바이오협회도 인공지능 표준 모델 확립 가능성을 제시했다.
엄승인 제약바이오협회 의약품정책실 실장은 "인공지능에 대한 필요성 조사에서 회원 제약사의 수요를 확인했다"며 "협회에서도 인공지능을 활용한 신약개발이 미래의 기본 툴로 자리잡을 것으로 판단해 인공지능 신약 개발 지원센터를 구축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신약개발이 점점 어려워지는 추세와 맞물려 데이터 자체가 빅데이터로 인력으로 감당하기 힘들어지고 있다"며 "1990년대부터 각 사무실에 개인용 PC가 설치된 것처럼 신약후보 물질 추론, 가설 영역에서 인공지능의 도입, 활용은 제약사의 표준 모델이 될 것이다"고 강조했다.
제약바이오협회는 인공지능 플랫폼을 구매, 회원사간 공동 이용이 가능한 신약개발 지원센터를 운영한다는 계획이다.
인공지능 도입이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할 가능성은 없을까.
엄승인 실장은 "인공지능이 사람들의 일자리 대체한다고 하지만 제약산업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며 "제약업에서의 인공지능 활용은 지금껏 인간이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영역이기 때문이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공지능은 신약개발에 필요한 하나의 툴이지 만능이 아니므로, 신약개발 후보물질 도출까지의 자료 입력, 분석된 자료의 해석, 인공지능 연구 방향 설정 등 필요한 인간 영역이 새로 추가된다"며 "따라서 데이터 매니지먼트 전문가 직군이 새로 생겨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실제로 해외의 경우 최근 자료 관리를 전문으로 하는 데이터 매니지먼트 파트가 생겼다는 점에 비춰보면 자료 분석과 인공지능 검색 방향 설정 역할의 전문 인력 창출 가능성이 높다는 게 그의 판단.
배영우 제약협회 전문위원은 "신약 개발 쪽으로는 인공지능 때문에 인력 감축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며 "인공지능은 사람이 잘하지 못하던 영역에서 효율성을 높여주는 것이지, 인간이 잘 하던 걸 대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신약개발 날개를 달아주자? "문제는 돈"
최근 일본 정부는 인공지능의 산업화를 위해 2030년까지 물류 부분을 완전 무인화하는 등 3단계 로드맵을 완성했다.
해외 산업군에서의 인공지능 활용 소식이 속속 전해지면서 국내에서도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최근 바이오와 4차 산업 관련 국제적 전문가들을 잇달아 영입한 제약바이오협회 역시 4차산업 영역에서 경쟁력을 제고를 위한 방안으로 인공지능을 지목, 정부의 지원을 촉구하고 나섰다.
제약바이오협회 관계자는 "이미 국내의 인공지능 도입은 해외에 비해 2~3년 뒤쳐져 있다"며 "제약산업이 국민산업이고, 이 산업군을 일으킬 미래 성장 동력이 바로 신약 개발이라는 점에서 인공지능 도입에 정부 지원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 정부는 과학기술 분야에 5년간 26조 엔을 투자한다"며 "인공지능이 신약개발 기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이번 적기를 놓치면 신약 강국으로의 도약은 어렵다"고 우려했다.
신약개발에 있어서의 인공지능 도입과 활용의 핵심은 공공이익에 부합한다는 점.
제약바이오협회 관계자는 "신약은 환자의 삶의 질, 수명 연장, 건강 행복도 등 다양한 지표와 연결된다"며 "신약이 산업군의 발전을 넘어 국가의 미래 성장 동력이라는 점에서 공공 이익에 부합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공지능 신약개발 지원센터 건립과 운용을 복지부와 함께 하고 있지만 예산이 부족하다"며 "인공지능 툴의 기능에 따라 초기 도입 비용이 달라지는데, 이를 협회 혼자의 힘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이다"고 지원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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