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자들이 한해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하는 추계학술대회 시즌이 본격화되고 있지만 그 열기가 예년만은 못한 분위기다.
특히 우리나라 의학계의 꽃이라 불리는 26개 전문과목 학회들의 학술대회는 더욱 침체된 분위기가 역력하다. 오죽하면 참석 인원을 늘리는 것이 최대 과제라는 말까지 새어 나온다.
세계적 규모의 국제학회들을 주관할 만큼 선도적 위상에 오른 우리나라 의학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 이유는 어느 원로 교수의 입에서 들을 수 있었다.
전문과목 학회 주요 이사직을 거쳐 이사장, 회장까지 역임한 국내에서 손꼽히는 석학이지만 그는 이번 추계학술대회에 후배들과 함께하지 못한다.
누구보다 학회와 학문에 애정이 많았던 그가 이러한 선택을 내린 이유는 무엇일까. 이어지는 그의 얘기속에는 현재 우리나라 의료 환경이 그대로 녹아있었다.
대학병원 보직자이자 현직 교수로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일이 쌓여가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밀려드는 환자들로 외래는 이미 포화를 넘어 초과 근무로 이어지고 있고 그러다보니 자신에게 주어진 병원의 행정 업무들을 도저히 일과 시간 내에는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일과 시간 이후에 일을 처리하는 패턴이 반복되고 그래도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는 일들은 주말까지 반납해야 하는 상황속에서 그는 결국 자신의 의사 인생에서 중요한 페이지 중 하나였던 학회를 포기하기에 이른 셈이다.
이는 비단 이 교수만의 일은 아니다. 다학제 진료의 정착을 위해 어느 병원보다 열정적이었던 한 대학병원은 최근에 사실상 이를 포기한 채 운영하고 있다.
밀려드는 환자로 외래가 몇 시간씩 밀리는 것은 예사고 환자들이 길게는 1년 넘게 교수를 보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상황에서 교수들간에 시간을 맞추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교육과 수련도 사치가 됐다.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을 모두 투입해도 부족한 상황이기에 전공의들도 이제는 실전을 통해 수련을 받고 있다. 그나마 교수들이 추후에라도 백업을 해주면 다행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연구와 학문, 교육과 수련, 중증 환자에 대한 체계적인 진료가 한번에 모두 무너진 셈이다. 비판적인 교수들은 이제 대학병원이 아니라 그냥 대형병원이라고 부르는게 당연하다며 자조섞인 농담을 던지는 이유다.
이러한 배경에는 정부 정책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 선택진료비와 상급병실료 등 부실하나마 대학병원에 쳐있던 진입 장벽을 걷어냈고 보장성을 급격하게 올리며 이제 대학병원은 무방비 상태에 빠진지 오래다.
하지만 이를 미연에 막겠다며 준비한 안전핀인 의료전달체계 개편안은 여전히 복지부 청사 어느 곳의 서랍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곧, 조만간, 더 논의를 거친 후에 등의 말들로 미뤄진지가 벌써 몇 번째인지는 세지도 못할 정도다.
이러한 가운데 오늘(2일) 발표한다던 의료전달체계 개편안은 또 다시 미뤄졌다. 이번에는 청와대에서 브레이크를 걸었다고 전해진다. 더욱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라는 이유다.
의료전달체계도 의원과 병원, 대학병원이 그나마 기능을 유지하고 있어야 복구가 가능하다. 임계점을 넘어 이미 아비규환으로 변해버린 시점에는 백약이 무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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