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가 됐습니다. 이젠 어떤 가치를 제공해줄 것인지가 관건입니다."
우리나라는 공적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게 된 첫 사례다. 비단 경제 분야만 성장했던 것은 아니다. 의료 역시 고도 성장하며 의학계의 질적, 양적 수준은 해외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교수들이 최근 부쩍 해외 학회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니란 소리다.
의정부을지대학교병원 신경과 윤병우 교수가 아시아태평양뇌졸중학회(APSO)의 신임 회장으로 선출된 것도 같은 맥락. 그의 말을 빌리자면 전세계 뇌졸중 연구자들의 한국을 향한 시선은 2010년 서울에서 개최한 세계뇌졸중학회 전후로 달라졌다. 치료 실적 및 시설, 인력 규모 등 저력이 알려지면서 그 역시 세계 속의 한국을 실감하고 있다.
내년 12월까지 APSO를 이끄는 윤병우 신임 회장 또한 고심이 깊다. 아시아태평양 내 위치한 회원국 31개국의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나라별 의료수준의 편차가 크기 때문이다. 이제 주는 나라의 위치에서 각 나라의 환경에 맞는 '어떤 가치'를 줄 수 있느냐가 관건으로 떠 올랐다는 것. 회원국간 편차극복을 최우선 선결과제로 설정한 윤병우 회장을 만나 임기 내 중점 추진 사업 및 향후 목표에 대해 들었다.
▲국내에서 아시아태평양뇌졸중학회의 회장에 선출된 첫 사례다. APSO의 구성원 및 연혁, 활동 내역이 궁금하다.
학술단체를 보면 크게 국제적 그룹과 국내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국제적 뇌졸중학술단체를 지역별로 보면 APSO는 미국, 유럽에 이은 세계 3대 뇌졸중학회다. 국제학회인 만큼 개인 회원이 아닌 각 국가별 회원을 대표자로 해서 31개 나라가 포함돼 있다. 일본, 호주, 뉴질랜드를 비롯해 인도, 파키스탄, 몽골 등 다양한 국가를 포괄하고 있다.
이전에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비슷한 학회가 두 개가 있었다. 이를 통합하려는 노력이 있었고 2009년 결실을 보게됐다. 2010년 세계뇌졸중학회를 우리나라에서 개최했는데 한 개 세션을 APSO가 맡아서 진행했다. 이후 APSO는 2011년도엔 스리랑카에서 첫번째 독자적 학술대회를 했고 매년 국가를 달리하며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이후 최근에는 코로나 팬데믹 이슈로 오프라인 학술대회를 열지 못하지만 2020년도 한국에서 버추얼 미팅을, 작년에는 인도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했다. 올해는 대만에서 12월에 개최하는데 팬데믹 이슈가 가라앉아서 대면 학술대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31개국 회원국들이 함께 한다. 물리적 거리만큼 장단점이 있을 것 같다.
학회별로 주도권 싸움이 치열하다. 미국 학회가 많은 질환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고 유럽이 서서히 다른 의견을 내면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의료란 것은 그 지역, 나라마다 의료 환경의 특수성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험 정책이 다르고, 사용 가능한 약제의 범위, 진료의 우선순위 등이 다르기 때문에 일면적으로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은 틀렸다는 식의 접근은 어렵다. 순수한 학술적인 내용이라도 모든 사람의 동의를 다 얻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쉽게 말해 지역별로 학회의 특성이 반영될 수 있다.
최신 지견을 발표하고 공유하는 그런 학회는 많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APSO는 다른 지향점을 가진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예로 들면 물론 미국, 유럽 등 서구 선진국 대비 장비, 인력 수준 면에서 뒤쳐진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이다.
많은 부분들이 개선되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곳도 있다. 한국, 일본, 호주 정도는 자국 의료 환경에 맞는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데 각 나라의 의료 환경이나 자원, 인력의 수준 차이는 아시아태평양 쪽이 커 중하위 소득 국가는 CT/MRI 장비가 환자 수 대비 부족하고 약제마저도 구하기 어려운 곳도 있다.
이종욱 펠로우쉽(장기 의사 연수과정)을 통해 라오스에서 펠로우 3명을 받았는데 라오스엔 MRI가 한대 밖에 없다. 이런 격차를 해소하는 방안을 공유하고 아이디어를 내는 것이 APSO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회장으로서 격차 해소를 목표로 세웠다.
▲회원국간 격차 해소 방안은?
제약사들은 돈이 될 분야만 연구한다. 이를 비난할 수는 없다. 가장 유망한 분야에 투자하고 연구해야 제약사 입장에선 다시 다른 프로젝트를 진행할 마중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저소득 국가의 경우 임상시험 등 제약사의 지원을 받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현재 국제적으로는 다국가 임상시험이 활발하고 한국도 주요한 참여국으로 많은 경험을 갖고 있다.
굳이 약물 관련 임상시험이 아니더라도 다국가 임상연구에서 저소득 회원국을 참여시켜 연구 경험을 쌓게 해주는 것이 트레이닝과 인적 교류 측면에서 큰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그 일환으로 각 나라별 뇌졸중 치료 현황 조사사업을 기획 중이다. 각 국가별 뇌졸중 특화 트레이닝 인력 규모, 응급의료시스템 구축 현황, MRI/CT 등 혈관 촬영실 장비 대수 등을 파악하는 조사를 진행하면 모든 회원국들이 고르게 연구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다국가 연구에 대한 개념 및 접근 방법에 대한 트레이닝이 이뤄질 수 있다.
물론 연구 결과가 나오면 국가별 편차를 파악해 개선하는 데 참고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장비, 인력, 시스템, 정부로부터의 보조, 표준 진료지침을 조사해서 이를 기반으로 열악한 나라에게 학회 차원에서 어떤 부분을 지원해야 할지 상의하려고 한다.
그런 지원 방안의 하나로 2주나 한달 정도 아태지역의 선진병원에서의 단기 연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 저소득 국가의 연수자에게 학회 차원에서 비용을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인데 이미 준비는 완료된 상태다. 팬데믹이 잠잠해지면 제도를 본격 운용할 것이다.
▲뇌졸중과 관련한 글로벌 유병률 현황 및 치료 트렌드, 해결 과제는?
예전에는 뇌출혈이 지금보다 훨씬 흔했다. 혈압을 조절하면서 뇌출혈이 줄었는데 문제는 기름진 식습관 및 운동 부족으로 질병 패턴이 서구화됐다는 점이다. 내가 처음 수련 받을 당시만 해도 두개내동맥이 좁아지거나 막힌 것이 95% 이상이었지만 서구에서는 경동맥 질환이 거의 대다수였다. 그런데 한국도 이제는 경동맥 질환자가 급증한 추세다. 회원국간 편차가 크다는 앞선 언급처럼 일부 회원국은 여전히 한국의 수 십년 전 질병 패턴을 가진 나라들도 있다. 선진화된 서구의 치료 방침을 그대로 그 나라에 적용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30년 전만해도 뇌졸중의 급성기 치료로 달리 손 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혈전 용해술이 도입되었고 요즘은 기계적으로 혈전을 뽑아내는 혈전 제거술이 생겨서 시술 성공률이 굉장히 올라갔다. 혈전 제거술 이후 환자 상태가 드라마틱하게 바뀌기도 한다. 응급실에 실려왔지만 시술 후 걸어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TPA 혈전 용해제 자체가 없는 나라가 있다. 혈전 제거술을 하려면 CT/MRI 장비 및 이를 백업할 인력 규모도 갖춰야 하는데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충분하지 못한 곳이 많다.
국내에선 과거 암 다음으로 뇌졸중이 사망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었는데 지금은 4위 정도로 내려앉았다. 사망률이 낮아졌다는 좋은 소식이지만 다른 측면으로 보면 예전에는 돌아가실 분들이 장애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장애가 발생하면 사회가 지원해야 하는 부담이 커진다.
빨리 치료해서 살리는 것을 넘어 어떻게 후유증을 최소화할까에 보다 방점을 맞추도록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 후유증 최소화에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이 장애 발생에 따른 총 비용보다 적기 때문이다. 미국 등에선 뇌졸중 급성기 치료가 가능한 병원에 자격을 부여한다. 미국은 그런 시스템이 공적으로 인정이 돼서 자격이 있는 곳으로만 앰뷸런스가 간다. 한국에서도 그런 방향이 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임기는 2년으로 짧은 편인데 중점 추진 사업 및 목표는?
코로나 팬데믹이 워낙 큰 이슈라 개별 질환은 가려진 게 사실이다. 특정 질환이 언급되지 않는다고 결코 질환 유병률, 치료 현황이 좋아진 것은 아니다. 코로나가 가라앉으면 중요 질환에 대한 관심을 더 많이 가져야 한다. 아태지역 국가에서 뇌졸중에 대한 인식 제고 캠페인을 시작할 생각이다. 학회 차원에서 뇌졸중 인지도를 확인해서 뇌졸중 초기 증상 때 대처 방법 등을 알리려고 한다. 앞서 언급한 각 나라별 뇌졸중 현황 조사사업과 함께 2년 안에 완료할 생각이다.
또 다른 하나는 회원국이 31개로 많다 보니 영어권 기반 나라보다 소통이 어려운 측면이 있다. 팬데믹 상황에서 회원 간 유대감도 느슨해졌다. 소통을 강화하고 회원국끼리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방안을 계획하고 있다. '다양성 아래 유대감'을 학회 모토로 삼았다. 2년 전에 차기 회장으로 선출이 됐을 때부터 전임 집행부와 계속 일을 해왔고, 현 회장 임기가 끝나더라도 전임회장으로서 2년 더 차기 집행부와 일을 하게 된다.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니다.
최근 보고에 따르면 뇌졸중 분야 최고 학술지인 Stroke에 게재된 한국 논문 수가 세계 5위 수준이다. 우리나라의 치료 실적 및 의료 수준, 인력 규모가 알려지면서 한국 의료의 위상이 많이 올라갔다.
한국은 보건복지부 지원 아래 2006~2015년도까지 뇌졸중임상연구센터 사업을 통해서 뇌졸중 표준진료지침을 자체 마련한 바 있다. 각 나라 상황에 맞춰 근거를 찾고, 이를 현지에 맞게 적용하는 과정은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 과정의 초기에 일부 해외 지침을 가져다 쓰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고 너무 답답했다. 이런 진료지침 제작 경험은 우리의 귀중한 무형의 자산이 됐다. 우리나라 근거에 맞추어 자체 지침을 마련했고 연속성 갖기 위해서 대한뇌졸중학회 내 상설 진료지침위원회를 두고 지속적인 개정, 보완 작업을 하고 있다. 이런 경험 및 개발 노하우를 진료 지침이 없거나 다른 나라 지침을 가져다 쓰는 나라에 전수할 수 있는 계기가 있지 않을까 한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지구 인구의 절반 이상이 살고 있다. 앞으로 APSO에 대한 역할 및 비중은 계속 증대될 수밖에 없다. 우리 세대는 후진국민으로 태어났지만 요즘 신생아들은 '선진 한국'에서 태어난다. 이제 한국은 '어떤 가치'를 줄 수 있느냐가 관건인 나라가 됐다. APSO 학회장으로서 그런 고민을 이어나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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