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세계보건기구(WHO)와 OECD 평가에서도 인정받는 의료 접근성과 경제성 측면에서 최고 수준의 의료 시스템을 구축해왔다. 의료기관의 지리적 접근성, 전문의 중심의 의료 서비스 제공체계, 상대적으로 저렴한 의료비용은 국제사회에서도 주목받는 한국 의료의 강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수성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국민은 한국 의료시스템의 우수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며, 의료정책을 둘러싼 불신과 사회적 갈등은 점차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의료정책이 본질적 목적보다 정치적 권력 획득 및 유지를 위한 도구로 활용되면서, 의료 전문가와 국민 간 불필요한 갈등이 유발되고 있다. 의료인들이 종종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는 현상은 이러한 정치화된 의료 담론의 부작용이라 할 수 있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의료현장의 실질적 문제 해결보다는 단기적 정치 이익을 위한 임시방편적 정책들이 반복적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보건의료 행정 담당자들의 전문성 및 소통 역량 부족은 이러한 문제를 가중시키고 있다. 결과적으로 의료현장의 실태를 적절히 반영하지 못한 비효율적 정책들이 지속적으로 도입되고 있다.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위원회의 설치에도 불구하고, 제안된 정책들은 의료현장과 상당한 괴리를 보이며 의료계 전문가들로부터 심각한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소아청소년과와 같은 특수 진료분야의 정책 수립 과정에서는 관련 전문가의 실질적 참여와 의견 수렴이라는 기본원칙조차 준수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향식(bottom-up) 정책 수립 과정의 부재는 정책의 실효성과 현장 적용성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부적절한 의료정책 결정에 관여한 정치인, 행정관료, 그리고 관련 학계 인사들은 자신들의 결정에 대한 명확한 책임을 져야 한다. 대한의사협회 역시 형식적인 대외 활동을 넘어, 회원들과의 실질적 소통과 의료계 전반의 의견을 효과적으로 수렴하여 진정한 대표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현 정부와 의사협회가 전공의와 의대생 중심의 문제 해결에만 집중하고 있는 점은 우려할 만하다. 특히 지역 의료의 현실적 어려움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미흡하며, 지방자치단체장들 역시 의료현장의 구체적 문제점과 실현 가능한 해결책에 대한 충분한 인식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부정확한 데이터나 방법론적 결함이 있는 연구결과를 토대로 국가 보건정책 수립에 지속적으로 관여하는 이들에 대한 엄격한 책임 추궁과 정책결정과정에서의 배제는 필수적이다. 의료행위 결과에 대한 사법부의 비현실적 판결 또한 의료현장의 위축을 초래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고위험군 환자에 대한 적극적 치료 의지는 심각하게 저하될 수밖에 없다.
의료 인력 양성에 있어 핵심은 단순한 의사 수의 증가가 아닌, 충분한 임상역량과 윤리적 책임감을 겸비한 전문 의료인의 배출에 있다. 이를 위해 의과대학 교육과정 및 전공의 수련 과정의 관리가 더욱 체계적이고 엄격하게 이루어져야 하며, 민간 영역에서 시행되는 평가제도와 유사한 질 관리 메커니즘의 도입이 적극 검토되어야 한다. 기술적 역량 배양을 넘어 환자 중심의 윤리적 의사결정 능력을 함양할 수 있는 교육과정으로의 재편이 요구된다.
의료계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는 일부 인사의 부적절한 언행은 의료계 전체의 신뢰도와 품격을 저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개인적 견해 표명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나,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서 발언의 사회적 파급효과를 인식하고 신중함을 유지해야 한다. 소수 의견에 대한 비난이나 온라인에서의 명단 공개와 같은 전체주의적 행태는 중단되어야 하며, 특히 선배 의료인에 대한 전공의와 학생들의 무분별한 비난 행위는 전문가 집단으로서의 성숙도를 의심케 하는 행태이다. 자신과 다른 견해에 대해서도 그 배경과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는 지적 포용성이 요구된다.
의료인은 전문적 교육과 수련을 통해 형성되며, 사회적 책무성과 이타적 가치 지향을 내재화해야 하는 사회적 소명이 따른다. 그러나 현 세대의 젊은 의료인들이 이러한 이타적 가치관을 진정으로 체화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존재한다. 최근 의료계의 투쟁은 근본적으로 지속가능한 의료 시스템 구축을 위한 것이나, 국민적 공감대 형성에 실패한 채 단순 반대와 투쟁의 양상만 부각된다면 궁극적 목표 달성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의료계는 국민적 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심층적 성찰과 효과적 소통 전략의 필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COVID-19 팬데믹, 계절성 인플루엔자 유행, 마이코플라즈마 폐렴 확산, 백일해 재출현 등 다양한 공중보건 위기 상황에서 대한의사협회를 비롯한 의료전문가 단체들이 사회적 책임을 충분히 수행했는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사회적 책무 이행의 불충분함이 의료계에 대한 국민적 신뢰와 공감 형성의 장애요인으로 작용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과거 의료계 투쟁 과정에서 학생과 전공의들이 선배 의료인들을 비판했으나, 현재 그들이 주도권을 가진 상황에서 얼마나 실질적 개선을 이루었는지에 대한 객관적 평가와 성찰이 요구된다.
의료개혁의 성공적 추진은 상호 이해와 배려를 기반으로 한 소통과 존중의 문화가 전제될 때만 가능할 것이다. 의료정책 수립 과정에서 현장 전문가의 실질적 참여 보장과 국민적 공감대 형성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정부는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정책의 한계를 인정하고, 의료계와의 협력적 논의를 통해 현장 적용성이 높은 실효적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의료개혁은 정치적 목적이 아닌, 국민 건강증진과 의료시스템의 지속가능성 확보라는 본질적 가치에 초점을 맞추어 추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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