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모르는 사람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큰 부담이다. 단지 의사라는 그의 직업과의 얕은 연계 고리를 찾아보지만 ‘화가’라는 그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를 만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커뮤니티 ‘메디게이트’에 연재하는 ‘강진화의 그림읽기’ 45편을 읽었고, 그와 관련된 내용이 있을까 싶어 인터넷을 뒤졌다.
그의 홈페이지의 방대한 소설, 시, 그림들을 발견 했을 때, ‘하루 이틀 만에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실 그간 열심히 본 것도 그에 대한 ‘Fact'에 불과하다는 것이 솔직히 대답일 듯 하다.
결국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질문거리도 머릿속으로 정리하지 못한 채 빈 수첩과 볼펜 한 자루만이 전부였다. 덤으로 명함까지 가져가지 않았다. 이런 얼토당토 안한 용기는 그의 글을 읽음에서였다.
그림을 본다는 것은 ‘안다는’ 강박감에서 다뤄질 문제가 아니라 ‘맘껏 즐기고 상상하고 그리고 소신껏 씹어 본 다음 장식할 만한 가치가 있으면 간혹 구입해서 갖고 논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수 많은 음악이 있으나 각자 좋아하는 음악이 다를 수 있는 것처럼, 또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소양강 처녀야’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도 있는 것 처럼. -‘강진화의 그림읽기’ 그림과 글의 연재를 시작하며
궁금했다. 그림을 배워본 적이 없는 그가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이 상을 받고 전시회에서 호평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랬다.
정말 특별히 그림을 배운 적은 없었다. 그의 그림인생은 중고시절에 연필로 낙서장에 끄적이던 시기로 되돌아간다. 그 사실도 뒤늦게 오래된 노트를 정리하면서야 발견한 사실이다.
공식적으로는 레지던트 시절 제주도에 파견을 나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무작정 동네 화방을 찾은 것이 그의 그림 인생의 시작이다. 다시 전공의의 힘든 삶 속에서 그림을 잊을 수 밖에 없었지만 그 시간이 오래 가지 않았다.
여기저기 봉직의로 떠돌면서 그의 그림은 자꾸만 쌓여갔다. 결국 그의 그림들은 ‘제4회 대한민국 국민미술대전’과 ‘제3회 서울미술전람회’에서의 입선을 시작으로 개인 전시회까지 이어졌다.
누군가 뉴욕에 가서 미술 공부를 하며 진로를 모색해보라는 조언까지 받았지만, 그는 의사로서의 직을 떨치지 못했다. 하루 하루 어두컴컴한 판독실에서 기계와 환자와 컴퓨터만 바라보다 지칠 때가 맍지만 그는 의사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취미로 하기 때문에 그림 그리는 게 즐거울 수도 있다“며 직업을 가지고 있기에 자유로운 그림 그리기가 가능하지 않겠냐는 말도 늘어놓는다.
글에 대한 애정 역시 대단했다. 틈틈이 연재하는 그림이야기 외에도 그의 홈페이지에선 그의 글들을 엿볼 수 있었다. 시와 소설, 수필 그리고 시국에 대한 진단까지... 학교 다니는 동안 문학상도 여럿 받은 적도 있다.
예술과 문학에 가까운 그. 그는 의사보다는 다른 일이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나의 대학시절은 광주사태에 의한 긴 휴교로 시작하여 축제 한 번 제대로 해 본적 없이 끝나버린 낭만과는 영 관계가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어줍지않은 사상과 당시 공부 잘하는 여자들의 속내중 하나였던 ‘여자로서의’열등감(?), 그리고 시대 상황에 의해 우리 세대는 청바지와 운동화,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는 언행으로 캠퍼스 생활을 했습니다. ‘오빠’란 단어는 없었고 ‘형’만이 존재하던 시절. 남녀 차별에 분개하고 자신이 여자이므로 ‘뭔가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인정하기 싫고 여전사처럼 그런 상황에 분개하며 조금이라도 그것의 타파를 위해 일조해야한다고 ‘굳게’믿고 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그리 쉽게 이뤄지는 일은 아니었으므로 때론 좌절하고 때론 발악을 해가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물론 많은 ‘이해’를 가장한 타협도 있었겠지요. -‘강진화의 그림읽기’ 마릴린 몬로를 좋아하세요?
광주사태로부터 대학시절을 시작한 그는 끊임없는 시위와 휴교,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과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20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레 이념서클에도 가입했다.
그의 그림에는 그 고민이 남았다. 언제나 ‘언저리’에만 머물렀던 과거에 대한 추억과 어느덧 기성세대로 변해버린, 그 속에서 과거와 다른 선택을 하고 있는 자신. 그림 속에 녹아있다. 한 언론사의 인터뷰에서 “80년대 민주화를 함께 외치던 동료들에 대한 빚진 마음‘을 30세가 넘어서야 극복했다”고 말한 적도 있다.
여성으로서의 그도 그랬다. 한국 사회의 보수성과 남녀 차별, 그를 뛰어넘는 의사사회의 보수성으로 인해 분개하며 고통 하는 깊은 고민도 있었다. 그런 그가 자본주의와 매스미디어의 첨병인 마릴린 몬로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렀다. 80년대를 지나 2000년 대를 맞았다. 80년 당시 20살의 파릇파릇한 대학생에게는 2009년대의 시간이 낮설기만 한다.
이제는 과거의 짐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한다. 그림도 자유롭게 그린다. 무언가 심정적으로 영향을 받거나 여행을 다니거나 자유롭게 영감이 떠오르면 그림을 그린다.
서울의대 80학번 진단방사선과 전문의 강진화. 그의 그림과 인생은 새로운 날개를 펼고 미래를 향해 힘찬 날개짓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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