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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노조 건설을 제안한다

김주경
발행날짜: 2003-09-07 20:24:54

김주경 대한전공의협의회 정책이사

무엇을 할 것 인가?

대한 전공의 협의회의 역사가 이제 7년에 이르고 있습니다. 유아적 시기를 지나고 이제는 일보 전진하는 모습으로 함께 어울어 가는 모습으로 서야 할 시기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현 시대 전공의들과 젊은 의사들이 살아 가고 있는 모습들에서 우리는 발전의 상을 정립하고 진보적 의사로서의 삶을 영위 하고 의사로서의 삶과 더불어 사는 사회인으로서의 삶을 살아 가는 모습을 우리 모두가 염원하고 있습니다.

서양의 의학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이후 사회의 변화, 경제의 변화, 의식의 변화에 따라 우리 의사들의 위치는 이전의 위치에서 많은 향상을 보여, 그 희소 가치성과 업무의 독점화 학습의 강도에 의해 쉽게 이야기해서 상류층의 계층에 속하게 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회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사회의 변화는 그 종속된 모든 구성요소 또한 변화를 요구 받게 됩니다. 정치적, 사회적 요구는 의대의 신설과 전문의의 숫적 증대로 이어지고 의사들의 수를 인위적으로 조절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의사들의 지위와 경제적 위치는 이전의 수십년의 위치에서 점점 하락하여 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지위의 변화를 누구 보다 정확히 느끼고 있는 것이 전공의 신분의 의사들이라 말할 수 있을것입니다.

수십년 전 전공의들도 현재와 비슷한 경제적 상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현재와는 다른 시대적 환경과 경제적 구조를 가진 사회가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많은 고통과 어려움에서도 미래를 바라보며 인내하고 버틸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현재 모습에서는 미래가 어떤 모습을 가질수 있는지 그누구도 예견할수 없는 현실에 봉착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사회를 구성한 역사와 현재 우리의 의료현실을 살펴보고 정리할 필요를 느낍니다. 발디디고 서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의 입장과 미래를 설계함이 기본적 정책과 요구의 자세라 여깁니다.


한국사회에 대한 고찰

어느 사회에서나 발전이 모든 것에 우위에 서있을때 많은 문제들에 봉착하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멀리서 찾지 않아도 우리나라의 오랜 역사속에서 쉽게 찾아 볼수 있습니다.

한국전쟁이후 피폐한 경제 구도 아래서 50-60년대를 보내고, 70년대에 들어서 새마을 운동이라는 이름아래 대대적인 경제 발전을 위해 모든이들의 이상과 관심을 발전과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제어해왔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경부 고속도로 건설 수출의 증대, 그리고 세계 유수의 대기업 발전으로 대표지어 질수 있는 시기를 거쳤습니다.

80년대를 거치며 독재정치 체제를 바탕으로한 경제 우선 발전논리는 더욱 강화되는 양상을 띠었고, 서민의 정치의식의 변화를 더욱 매몰차게 몰아 부쳤던 것입니다.

60-70년대와 8-90년대는 서민의 정치적 시각과, 경제적 시각은 확연한 차이를 나타냅니다.

아무런 생산 동력이 없던 시절의 서민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조차 힘든 고통 속에서 어떤 의식이나, 가치관보다, 노동력을 이용한 의식주 해결만이 삶의 가장 기초적인 요건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세계의 문화와 정치개방을 억제하고, 문화적, 정치적 소극주의로 일관한 독재는 아주 간단하면서 쉽게 국민의 노동의 최전선에 서있도록 할 수 있고, 기본 의식주를 해결해 나가는 통치수단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통치는 쉽게 국민 통합을 이뤄내는 듯이 보였고, 경제의 발전을 한걸음에 달성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독재의 경제 발전은 문어발을 지닌 기형적인 대기업을 낳았고, 지역 편중화된 경제 발전을 낳았다. 기형적 대기업은 우리 국민 대부분이 대기업의 하청업에 종사하는 구조를 이루고, 심화된 빈부격차를 낳고, 재벌귀족이 정치를 주무르는 이 현상을 낳고야 말게됩니다.

대기업의 부도를 막기 위해 많은 차관을 도입하고, 그들에게 세금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사태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80-90년대의 서민들의 기본적인 소득의 발전은 문화적 사상적 발전을 낳게 되었고, 필연적으로 의식의 발전을 가져왔고, 의식의 발전은 새로운 경제 체제와 새로운 정치체제에 대한 기본적인 욕규를 불러왔습니다.

이 욕구는 독과점적인 정치체제하에서 권력의 재분배를 요구하게 되었고 더불어 경제의 독과점형성을 반대하게 되었습니다.

대화를 통한 서민과 정치세력간의 양보는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형식이었기에 상상할 수 없는 듯이 서로 맞서고, 조정되지 못하고, 물리적 힘의 역학관계로 치닫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당연히 물리적, 경제적 힘의 우위에 서있는 지배조직은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으로 서민의 불만을 억제하고 맙니다.

이로 인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분명 역사성과 개념의 이질감이 있음에도 부구하고 같은 개념으로 이용되어지고, 일방적인 가치관 획일적인 주입식논법으로 흑백논리를 강요해옴으로써 민주주의의 필수 덕목인 이성을 이용한 대화, 타협, 양보의 미덕은 찾아볼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초기의 비조직적인 서민들의 이러한 의식의 변화는 물리적인 힘에 의해 제어되고 억제 되어왔으나, 점점 조직적이고, 효율적인 조직의 건설은 물리적인 힘과 맞서게 되고, 어쩔수 없이 민주적 의사참여의 권리를 국민들과 나누는 형식을 도입할 수밖에 없는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러한 비효율적이고, 비정상적인 역사적 태생에 의해 한국내에서의 자본주의는 재벌에 의한 경제적 발전을 기초로 이어져오고 있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 드디어 재벌에 의한 경제발전은 그 부적용이 점차 드러나고 재벌의 독단적 경영은 IMF에 의해 나라의 경제가 결정되어지는 씁쓸한 신식민지 국가의 나락으로 떨어 뜨려버렸습니다.

많은 이들이 지나치게 많은 요구가 정부와 경제를 망치고 어렵게 했다고 생각하던 이들도 분명 있습니다.

그것보다는 오랜 독재가 만들어낸 정경유착, 재벌의 귀족화, 기업이념의 전무, 기업재정의 사재화, 기업의 세습, 이러한 것들이 우리경제를 우리의 사화, 경제를 이렇게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고 봅니다.

중세 시대 이후 근대시대를 지나며 베이컨, 데카르트 그리고 칸트의 시대를 거치며,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각개인은 대화와 설득 그리고 이해를 통한 적절한 양보를 미덕으로 삼아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민주주의라는 기본 정치 체제의 형성을 낳게 되고, 변하지 않는 가치로 자리잡아오고 있는 숭고한 이념의 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중세의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기본적인 자세로 자본주의의 기초를 쌓았다고 볼 수있다. 이를 바탕으로 많은 제국주의는 식민지를 개발하고, 식민지에서 약탈한 물품을 바탕으로 자국의 이익을 지켜내는 경향을 보였다.

이후 많은 애덤 스미스로 대표되는 경제학자들이 자유방임적 경제정책을 제안하고, 개선된 의미의 자본주의를 이끌어냅니다.

이에 마르크스 엥겔스로 대표되는 철학, 경제학자들은 자본론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개념의 경제체제를 확신하며 파리 코뮨을 이끌기도 했으며, 러시아를 혁명으로 이끌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대립되는 경제 원칙들은 서로 수정이 가해져 수정 자본주의, 사회 민주주의 등 수없이 많은 경제원칙들로 오늘날 각국에서 도입되어 변화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원칙들에서 변함없이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깨뜨리지 않는 것이며, 이성이 가장 중심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종적인 관계보다, 횡적인 관계가 중요함을 많은 이들이 인정하게 되고, 횡적인 인간관계의 기본적 교향을 쌓아가고 있다고 봅니다.

그동안 우리는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독재하의 경제 우선정책하에서 이데올로기 공세하에서 맘껏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었고, 한국 재벌 경제의 어려움 속에서 묵묵히 자기자리를 지키며, 나의 잘못인양 열심히 반성하고, 열심히 절약하며, 일해왔습니다.

우리의 역사, 아니 세게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언젠가 다시 우리는 우리의 의식의 발전을이루어낼것입니다. 주변 물리적 환경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의식의 변화와 발전을 낳게 된다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보편적인 결론이 눈앞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의료의 역사와 특징

2000년 의료계의 장기적인 휴업 투쟁을 모두가 잘 기억하고 있을것입니다.

구정부 즉, 국민의 정부는 처음 정권을 잡았을때의 국민의 기대감과 정권 창출당시 공약을 바탕으로 의료의 전반적 개혁의 일환으로 의약분업을 제시했습니다. 오래전부터 많은 개혁 단체에서 그리고 진보 의료 단체에서 제시해왔던 기본 개념을 정책화하고 일사분란하게 처리해 보려고 했던것입니다.

그러나 이내 많은 문제점들에 부딪치고 맙니다. 정부는 의약분업에서 발생하는 기본적인 재정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릅니다. 그동안 관행처럼 있어왔던 약에서의 차액으로 의사의 진료비를 감당해왔던 많은 부분의 비용과 적정 진료에 대한 개념 분석없이 의약분업을 시행함으로써 가장 기본적인 금전의 문제에 의한 투쟁에 불을 당깁니다.

우리나라 의료의 체계를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특징적으로 시장 관리형의료 전달체계를 기본 골격으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 전쟁이후 의료는 한국전을 참전했던 많은 나라의 도움을 받아 서양 의학을 발전을 볼 수있었습니다. 미국 그리고 유럽의 몇몇 나라의 도움을 얻어 몇 개의 병원이 세워지고 의술을 전수 받아 오는 시기였습니다.

이후 개인 의원과 개업의들의 병원이 생겨나고 이러한 의사들에 의해 민간 의료가 차지하 는 비율이 점점 높아지게 되었고 의료 전반에 걸쳐 많은 부분에서 관리자로 나서게 됩니다.

정부는 보건소 보건지소 보건의료원 보건 진료소등 나름대로의 영역으로 의료체계의 확립과 관리를 위해 노력하고, 정책면에서 구서, 결핵퇴치, 가족계획등 몇몇 중요한 사안들을 계획하고 추진합니다.

그러나, 70-80년대 경제 성장위주의 정책으로 인해 복지사업내의 보건의료에 대한 사안은 민간에 위탁되어지는형상이 되어갑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국민들의 경제적 향상과 건강에 대한 인식의 증가로 인해 보다 나은 설비와 전문성에 대한 귀결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에 시장의 논리로 이어지는 민간의료는 경쟁적이로 고급 기자재와 진단의 정밀화를 추구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의료 전달체계의 왜곡화를 부채질하는 기형을 낳는 시발점이 됩니다. 청진기 하나로 시작된 의원은 초음파, CT, MRI를 가진 최첨단 의료환경을 가질 것을 요구받게 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러한 환경은 의사들에게 진단과 치료를 극대화 하고, 경쟁을 유도하고 발전을 가져왔다는 표면적 가치보다는 더많은 투자와 의원대 병원의 경쟁체제. 나아가 병원과 종합병원의 경쟁이라는 의료 전달체계의 무질서를 낳는 기현상을 생산하게 됩니다. 환자는 더빠른 의료제공과 더많은 진단 장치를 찾고 많은 일차의료현장에 대한 불신을 낳게 되었습니다.

종합병원의 기형적 팽창을 가져 왔고 질적인 면에서 보다, 양적인 면을 훨씬 중요시하는 형태로의 진행은 자본주의 상황의 의료 전달체계에서 더 이상 피할수 없는 역사로 남았다고 볼수 있습니다.

이러한 개괄적역사적 관점에서 정부는 이제 새로이 의료전달체계에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변형을 가해 보려는 노력을 국민의 정부의 출범과 함께 시도했던 사업이 의약 분업이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의사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개원의 봉직의에서 진료에 대한 수당적 의미의 진료비는 실제적으로 낮게 책정되어지고, 그부분을 정부가 감당하지 못하는 현실속에서 오랫동안 약값의 차액을 이용함으로써 상당부분 보충 할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부분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약속하지 못한채 의약 분업을 강행함으로써 많은 의사들에 의해 의약분업은 강한 저항을 낳고 현재까지도 많은 사안들에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가지 우리나라의료의 특징을 짚고 넘어간다면, 약사의 일차 진료가 오랫동안 이어져왔다는 것일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는 서양의학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 이전 오랫동안 우리는 중국에서 건너온 한의학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진료와 약조제를 함께 행해왔던 오랜 관행은 서양의학이 건너오면서 국민의 정서속에서 의사와 약사의 개념과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는 혼돈을 낳게 됩니다.

서양에서의 의학 역사속에서 오래전 연금술사로부터 내려져 오는 의학은 수많은 임상과목과 많은 기초학문 분야로 개념 분리를 이루어 내려왔습니다.

이에 현재 있어오는 수많은 과목들의 출현을 낳았고, 그속에서 하나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약에 대한 중요성과 전문 연구의 열망은 약학의 독립을 이루어 냅니다. 이로써 약사의 독립을 이루어내고, 약사의 분명한 역할과 목적을 규정받게 된것입니다.

우리는 틀을 가지고 있으나 그안에 있는 내용을 모두 이해하고 정리하지 못한채 급격한 변화를 겪는 과정 중에 우리나라의 의학에 대한 수용은 변형을 거칩니다. 오랫동안 겪어왔던 한의에 대한 인식과 중복과 토속적 관행은 서양의학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약국이 일차의료를 담당하게 되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는 과정을 이루어냅니다. 거기에 민간의료에 맡겨진 자본주의 의료체계의 경쟁논리는 피할수 없는 의료비의 상승을 낳고, 이로인한 의원 병원에의 접근도를 더욱 떨어지게끔 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정부는 오랫동안의 이런 파행을 막을 수 있을만큼 복지정책에 대한 여유를 가지지 못한채 뒤돌아 보지 않고 달리는 형상을 보이며 곪아 터지면 손보는 사후대책만을로 일관해 왔던 것입니다.

정책을 입안해왔던 많은 이들이 이러한 왜곡을 눈감아 오면서 더욱더 의료체계의 파행은 심각해져왔고, 이는 기본적 틀- 약국의 일차의료 담당을 깨기 힘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볼수 있습니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임상약사제라는 이름으로 더더욱 이현상을 심각하게 만들어가고 있는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으로 의학에 대한 몰이해와 약학의 종속성에 대한 역사적인 기본에 대한 무시라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많은 역사적 기록들에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읽을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이해없는 사안들에 대한 결정은 그이해 당사자의 깊은 대립을 낳고, 그대립은 언제난 힘과 정치적 논리로 정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힘과 정치적인 논리는 쉽게 말하자면, 설득과 회유의 논리로 설명될수 있습니다. 이해 당사자간의 논리가 아니 피혜택자에 대한 설득과 회유가 주가되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길게 얘기해왔듯이 역사적 몰이해는 정책의 시행을 위해 궁극적 미래적 가치만을 쉽게 떠올리도록 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의료 체계의 명확한 확립 그리고 의약분업의 정착후의 상황에 대한 안정적이고 밝은 미래적 가치관을 위해 희생과, 복종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현실로 눈돌려 보겠습니다. 앞에서 밝혔듯이 역사적으로 많은 부분에서 의료는 민간에 이양되는 양상을 보이고 정부는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왔다기 보다는 방관자적 입장에서 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쟁과 수요창출을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시장의 논리를 의료에 그대로 적용해 왔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 시장의 상인으로 의사를 몰아 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들은 모두가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임을 알고 있습니다. 시장에서 수요자와 공급자는 원할한 관계를 유지하는 듯 보이지만 불신과 함께 더나을 것 같은 공급자를 찾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불신과 과대 광고를 낳는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료현실이 현재 시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시장 속에 우리는 상인으로 위치 지어 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그위치에서 우리는 역사 속에 있어왔던 존경과 사랑의 헌신을 버리도록 강요받아 왔던 것입니다. 가끔씩 풍요하고 여유있는 상인들이 존경받고 귀함을 받듯이 의사들도 그런 위치에 처해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증거들 속에서 이제는 사회주의적 가치관까지 강요 받고 있는 기막힌 현실이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헌신과 복종을 강요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속에서 우리시장 상인- 의사에게 히포크라테스가 되기를 애써 강요받고 있는 형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한가지 중요한 것은 우리의 위치를 파악하고, 우리의 역할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상인임을 강요받는다면 어쩔수 없이 상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히포크라테스이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환경을 우리나라의 의료현실과 수혜자인 국민들에게 정확한 의료정책을 전파하고 신뢰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것은 당사자 들입니다. 상인으로 매도 당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진정 우리나라의 올바른 의료정책을 위해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것입니다.

한국에서 전공의로 산다는 것은!

이제 한국사회의 거시적 개괄에서 벗어나, 당면한 우리들이 일하는 사회의 문제를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한국사회의 특수한 상황은 모든 대집단과 소집단의 형성과 발전에도 함께 끼치게 되어왔습니다.

원론적 의미의 병원의 이상과 그 안에 일하는 위의 이상이 서로 공조하고, 합일점을 찾을 수 있을때 비로소 안정된 집단으로서 자리 잡을 수 있을것입니다.

이제 병원의 이상과 그안에 있는 전체 직원들의 이상 그리고 병원내의 환자들이 바라는바 그리고 지역 주민들이 바라보는 병원의 방향들이 서로를 거스르지 않고 안정적으로 정리되어야 할것입니다.

병원은 일반 직장과 달리 사용자 피사용자들만으로 그 구성을 정의 내리기 힘이 듭니다. 병원내에는 사용자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피사용자도 아닌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의사와 그리고 환자들이 그런 사람들에 해당 될 것입니다. 어찌 보면 병원의 이상은 아주 쉽게 정리 될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환자들의 병을 정확히 진단하고 적절히 치료하는 것 이것 만큼 간단할수 없을것입니다. 어쩌면 일반 병원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직장은 사용자와 피사용자의 계약적인 관계로 피사용자의 노동을 기본으로 수익을 창출하고 그수익의 일부를 노조라는 합의체와 사용자들이 합의 하에 기본적인 수입을 결정합니다. 어느 한쪽의 이상만을 고집하지 않고 적절한 대화와 타협이 필수 불가결한 덕목입니다. 병원은 앞에서 얘기 했듯이 올바른 치료를 수많은 이들이 일하는 직장이라는 공간으로 정의하고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우선 전국의 전공의가 병원에서 수련을 하며 진료와 학습 그리고 환자의 관리를 담당합니다. 각자의 의국에 속해 있으면서 각과의 최전방에서 진료를 행하는 의사입니다.

각자의 가정이 있고 월급으로 생활하며, 거의 비슷한 사고와 비슷한 환경속에서 하루를 보냅니다. 시간과 잠의 부족이 우리에겐 늘 붙어 다니는 친구이며 이로인해 가끔씩은 짜증과 우울이 우리를 지배함을 느끼곤 합니다.

가끔씩 직장 다니는 친구들과 술한잔 하면서 얘기 나누다 보면 그들이 받는 수입에 놀라고 자신의 수입에 놀랄때가 있습니다. 8시간 근무하는 친구의 수입보다, 자신이 밤새며 생명과 싸우며 받은 수입이 너무 적음이 이제는 별로 놀랄일이 아니게 된지 오래된 일입니다. 거기에 깐깐하고 터무니없는 보호자라도 대면하는 날이면 정말이지 못해먹겠다는 결심을 하루에도 몇 번이나 하곤 합니다.

이것은 이제 남의 나라 일이 아니라 우리 한국의 전공의의 보편적 모습이 되었습니다. 전공의는 의사이기 전에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전공의는 각각의 병원 각각의 과에서 짧게는 1년 길게는 4년을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느끼는 정도는 달라도 제반 문제들을 답답해 하고 시정해 나가기를 바라고 있을것입니다. 이제 함께 이야기하고 이런 문제들을 원칙들을 가지고 풀어 나가기를 바랍니다. 이에 보건의료 전반에 관한 문제를 바탕으로 상황과 발전 방향을 제시해 나가야 할것입니다.

전공의 노조의 수면위 부상 배경

오래전부터 불만에 차있던 많은 의사들 사이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노조에 대한 막연한 목표들을 토로해왔던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의사들이 돈벌이가 신통찮아지고 자질구레한 송사가 잦아지고 정부의 정책들이 예전만큼 느슨하게 의사들을 놔두지 않는 현실이 피부에 와닿을때 이런 푸념섞인 목표는 자주 거론 되곤 했었습니다.

그 합법적 근거에 대해 많은 이들이 주의하고 추구 해왔던 시기들을 거치고 이제는 제 7기 전공의 협의회에서는 구체적인 공약으로 정리하여 진행시키고자 하는 시기에 이르고 있습니다.

가장 근래에 있었던 2000년 의사파업 당시 많은 의사들 그중 전공의들 사이에서 이런 이야기들은 공공연히 퍼져나가고 언젠가 분명 만들어질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들이 떠돌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전공의가 몸담고 있는 병원들이 고전적 의미의 비영리 목적의 사회 사업내지는 의술 의학의 발전에 대한 공헌 이라는 목적에서 벗어나, 점점 영리적인 목적으로 이용됨에 따라 적정 임금과 합리적인 진료환경 그리고 교육의 체계화에서 이탈함에 따라 이러한 관심은 더욱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구충족이 의사라는 지위에서 가능할 것만 같았던 시대에서 이제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현재의 고단함 그리고 자신의 불만을 억압받는 현실속에서 공동 대처할 강력한 조직의 출현에 대한 기대심들이 강력한 조직을 요구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런 많은 공공연한 기대와 우려들은 이제 전공의 사회에서 점점 공론화되고 대화의 중심부로 이동하고 이제 노동조합이라는 형식에 까지 이르고 있는것입니다.

노동 조합의 의미

고전적의미의 노동 조합은 노동자들의 연합체입니다. 노동자라는 의미는 가장 기초적인 노동을 생산수단을 이용해 잉여가치를 창출하고 그것은 사용자에게 이익을 만들어지는 구조로 이어지는것이고 사용자는 더 많은 잉여가치의 추구를 위해 노동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필연을 낳습니다.
이러한 희생의 강요를 효율적이고 조직적으로 저지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찾으려는 조직적 요구는 노동 조합이라는 적극적 전향적 조직을 만들어 내기에 이릅니다.

분명 사회의 변화와 직업의 다양성으로 19세기에서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이러한 도식적 흐름은 현재에 모두다 적용하기는 어려운점이 많습니다.

육체적 노동만이 생산 수단으로 직업적 가치라 여겨졌던 시대를 벗어나 지식산업 즉, 인터넷 정보산업에서의 직업들, 수많은 개인 엔터테이너들의 출현, 그리고 많은 소자본 개인 사업인들의 출현은 이제껏 보지 못한 새로운 직업과 예상치 못한 탈 육체적 생산수단의 소유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전 시대의 고전적 생산과 노동의 개념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개인적 성향을 띄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의사가 노동자인가?

과거 의사는 생산 수단과 잉여가치를 모두 다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부르주아 계급의 전형이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현재도 형식에 있어서 의사는 별반 많은 변화를 겪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의사 전체의 숫적 증가는 부르주아 계급의 전형을 보였던 개업의들의 과도한 숫적 팽창은 봉직의 전공의들의 숫적 상대적 팽창을 낳고, 이러한 역사적 변화는 의사의 지위에 대한 하락에 대한 자조적 인정을 낳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현상은 의사들의 특히 전공의들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근거하는 측면이 다분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자조적인 어투로 전공의와 일부 봉직의들은 자신을 일일급여의 노동자에 비교하고, 별 반 차이가 없슴을 공공연히 푸념하는 현실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차마 노동자라 불리기 싫어하고 노동자라는 틀속의 조합은 더더욱 싫어하는 반공의 선두주자 의사사회에서 노동자의 조직을 만들것이라는 논의는 의외의 일이라 할수 있을것입니다.

가장 쉽게 이런 논의는 자신들의 절대 가치 즉 첫째, 자존심의 상실이며 둘째로, 사회적 지위 하락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터놓고 솔직히 문제를 다시 곰곰이 이야기 해보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나 일반인들에게도 이런 지위의 하락을 인정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자존심과 배타적인 의학지식으로 뭉쳐진 우리는 아직 겉으로는 인정하기 싫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일수도 있습니다. 동료끼리는 인정하나 아직 사회적인 자존심으로는 인정하기 힘든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념의 부정확성에 근거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가끔씩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같은 개념으로 혼동하듯이 사용자, 부르주아와 상층 계층을 를 같은 개념의 틀안에서 사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하고 싶습니다.

전 사회를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버리는 사고에서 벗어나, 경제적 측면의 사용자 피사용자의 입장에서 구별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경제적 생산수단과 잉여가치의 위치적 관계로서 전공의의 위치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탈이데올로기적 가치관과 전향적인 사고의 변화가 우리의 위치와 지위에 대한 바른 파악에 도움이 되리라 여깁니다.

이러한 사고적 발전으로 우리 전공의는 노동자의 위치에 서있다는 것을 이제는 바로 인식해야 합니다.

왜 노동조합인가

많은 세월동안 전공의는 조금씩이나마 자신들의 생활여건과 환경의 발전을 위해 많은 조직들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단체가 현재도 유지되고 있는 의국과 총의국의 형식입니다.

내용적 변화와 형식의 변화는 있었지만 대전협 또한 이러한 의국과 총의국의 토대 위에서 발전하고 있는 조직입니다.

대전협이 6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전공의들의 불합리한 여건에 대한 개선과 의협내에서의 지위 확보 그리고 발언권을 키워 오면서도 정작 다시 노동조합이라는 새로운 조직체를 건설해야 하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이러한 논의를 하기 전에 일단, 왜 노조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정리 해보고 대전협과 노조의 관계 설정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합니다.

오랜 기간동안 우리 의사는 전문직이라는 개념 아래 많은 이들이 부와 명예를 누려온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오랜 세월 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이러한 지위의 확보는 역으로, 전공의들의 의견행사에 걸림돌이 되어오고 있었던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전공의들의 상황은 미래를 위한 담보로 저당잡히고 있을 수 있는 미래를 위한 투자정도로 이겨내어 왔던 것입니다.

이제 의료환경이 새로이 바뀐 체제하에 사는 의사들은 결코 빛나지 않을 미래를 알고 있는것입니다. 장밋빛 미래를 예견하기 힘든 시기에 우리는 놓여있는 상황인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밝은 미래의 담보로 여겨졌던 전공의생활은 또다른 불분명한 미래의 하나의 과정일 뿐인것입니다.

더없이 많아진 의료소송과 이제 의사들의 고유영역으로만 여겨졌던 많은 의학지식들이 일반인들과 공유되고 수없이 많은 의사들이 양성되면서 의료의 최일선에 있는 전공의들의 위험 부담은 그만큼 커져가고 있습니다.

생명을 담보하는 일의 최일선에 서있는 전공의는 그렇게도 믿어오던 책임의 울타리 밖으로 자꾸만 밀려나가고 있는 형상에 접해있습니다.

즉, 점점 술기(procedure)의 소극화와 책임 문책의 위치로 자꾸만 밀려나고 있는것입니다. 그러기에, 전공의 시기의 비 합리적인 교육의 파행은 또다시 전공의의 전임의로의 자연적인이행과정을 겪는 이중적인 수련 제도로 병원은 다시 한번 고급인력의 저임금 정책에 성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생적으로 고유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은 이제 깨어지고 있는것입니다.

자신의 생산수단을 이용해 잉여가치를 생산해냈던 시기는 지나고 이제 의사의 희귀성을 벗어나 수없이 많은 의사들 속에서 자신의 노동으로 사용자의 잉여가치를 충족시켜 주고 임금을 받아가는 피사용자의 신분에 있는 시기가 훨씬 더 많아지면서 의사의 위치는 흔들리고 있는 것이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 위치의 흔들림의 여진은 가장 노동자의 위치에 가까운 전공의에서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가치의 창출 만큼 보상 받지 못함으로 인한 상실감, 지위의 변화는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게끔 변화를 요구받게 됩니다. 충분한 임금과 적절한 여가의 보장이 새로운 화두로 제시되고 있는것입니다.

여기에 이르러 병원과 전공의는 이제 임금을 사이에 두고 새로운 협상의 자리를 만들어 나가야 할필요를 느낍니다.

그러나 이 협상의 테이블은 기본적으로 평등한 관계로 출발하지 못하고 상하 관계로 시작됩니다.

전공의 신분의 문제가 다시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병원은 전공의에게 피 수련자의 입장을 강요합니다. 견습생의 입장에서 서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전공의의 진료 수준의 평가를 절하하고 학교의 입장에서 수혜를 받는 입장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 논리는 배움의 가치가 임금의 가치보다 훨씬 더 큰 것을 강조하며 임금과 복지의 협상을 지리 멸렬하게 이끌고 있는것입니다.

여기에 다시 협상을 막는 새로운 변수는 교수 과장님들의 위치입니다.

사용자도 피사용자도 아닌 중간자적 입장을 지니며 개개의 성향에 의존해 협상의 테이블에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강력한 응원자로 아니면, 강력한 반대세력으로 전공의의 입장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일관적이지 못하고 일과성의 협상은 전공의들의 응집을 방해하는 측면이 많다는 문제점을 낳는 결과를 보입니다.

전공의들이 협상의 전면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많은 점들에서 문제점들이 제기 되는 이유에 이러한 것들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점들에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첫째, 전공의의 위치의 문제입니다. 전공의는 분명 수련받는 피교육자의 신분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배움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특이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병원의 일방적인 배움의 제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전공의 교육의 특성은 도제 운영 체제와 일견 닮은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술을 전수받기위해 하나의 집단에 함께 생활하며, 상하관계를 뚜렷히 하면서 내림차식의 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병원이라는 건물내에서 한 팀이 공동의 대처를 하면서 경험적 진료를 기본으로 하면서 전수를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병원은 건물과 진단 기구의 제공으로 인한 진료 팀의 확보 외에는 그다지 큰 역할을 한다고 볼수 없는 구조적 위치에 서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로 보면 전공의는 경험의 전수로 진료에 임하고 학교의 학생의 개념으로 설명할수 없는 팀의 운영이라는 점에서 공동의 진료팀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어져야 할 것이며, 이는 전공의가 진료함이 결코 단독 진료는 없으며 전반적인 팀의 감독과 연구에 의한 것이라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전공의의 현재 위치는 학생의 신분이라기 보다는 진료팀의 일원이라는 의식이 더욱 중요하리라 여겨집니다. 진료팀의 일원으로서 제 권리 찾기로 이제 다시 한번 위치의 변화를 주장해 봅니다.

최전방 진료에 임하고 있는 전공의에게 이루어지는 부당한 임금과 복지의 수준과 위험에 대한 노출에 대한 불충분한 보상은 이제 결코 수련자의 신분이라는 문제로 운운 되어질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중간 사용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교수님들과 과장님들의 위치 문제입니다.

위의 논리로 보았을때 교수님들과 과장님들은 병원이라는 건물의 핵심 멤버로 수련을 행하는 스승의 위치에 서있으며 병원의 중추세력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결국 병원이라는 이름으로는 그들에게 부당함과 부족함을 주었을때 손해를 볼 수밖에 없기에 중간 사용자의 위치에 설수 있는 잇권을 베풀어 준것이라고 설명할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훨씬더 병원의 사용자에게 더욱 강자의 위치로 서 있을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위치라 파악된다면 그들은 전공의 들이 그들의 존재 가치에 해가 되지 않는 다면 늘 전공의의 편에 서있는 가장 강한 협력자로서 위치 지어져야 할것입니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그들의 존재 또한 이제는 확고부동한 위치에 서있지 못하는 존재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전문의의 양산에 의해 그들의 위치 또한 이제 점점 피사용자의 신분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할 시기가 곧 도래하고 있다는 인식이 시급합니다.

현 전공의 협의회가 전공의 노조의 역할을 하지 못하나?

이제 우리는 우리 전공의에게 노조의 필요성과 우리와 교수님 그리고 스탭들과의 위상 정립에 대해 정리를 했습니다. 왜 우리는 전공의 협의회를 두고 다시 노조를 설립해야하는지에 대한 문제에 답을 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노동조합은 노동 3권을 법적으로 보장 받습니다. 단결권, 단체 교섭권, 단체 행동권을 법적으로 보장 받고 이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현 전공의 협의회는 법적인 단체라기 보다는 친목적인 회합의 의미가 훨씬 강한 구성체라고 볼수 있습니다.

법적인 구속력이 없고 각 단위 병원에 교섭력 또한 없는 조직적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가입과 탈퇴의 정확한 개념 또한 정리 되지 못하는 구성체에서 벗어나, 정확한 목표와 행동방식의 법적 보호를 받을수 있는 새로운 구성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대안이 노동 조합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노동 조합을 할 것인가?

가장 기본적이고 간단하게 두가지 방법적 선택이 있을 것입니다.

첫째가 기존의 보건의료 노조에 전공의가 가입을 하는 방법이 있을것입니다. 둘째는 전공의 고유의 독자적인 노동 조합을 가지는 것입니다.

기존의 보건의료 노조에 가입을 하는 경우 기존의 보건의료내에는 paramedics 즉, 간호사 방사선사 그리고 많은 병원 직원들이 이미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들과 전공의들의 관계는 개인적인 친분이나 인간적 관계는 별반 문제 될 것이 없이 호의적인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병원내에서 그들과 전공의의 위치는 order를 내는 입장과 order를 받는 수동적 관계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그들이 주장하는 많은 주장들과 현재 전공의가 주장하는 내용들은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될것입니다.

예를 들어 임산부의 야간 업무 금지 조항, 시간외 근로에 대한 수당의 문제, 월급의 구조의 상이함과 차이, 등 그 외의 많은 부분에서 나타나는 이질적 차이는 조합의 단결력에 결격사유가 될 수 있기에 함께 조합을 운영함에는 분명 많은 문제의 소지가 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렇기에 전공의 고유의 노동조합을 결성해야 할것이고, 단, 그것은 타 노조를 배타적을 대하지 않는다는 기본 가치관을 유지함은 필수이어야 할 것입니다.

전공의 협의회와 전공의 노동 조합의 위상은?

기본적으로 우리 대한 전공의 협의회가 지향해야 할 노동 조합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전공의 협의회의 노조 전환을 목표로 해야 할 것입니다. 노동조합을 목표로 하는 이유에서 충분히 밝혔듯이 노동 3권의 법적 보장을 목표로 하고 그중 단체 교섭권의 안정적 확보를 최상의 가치로 추구하는 상황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현재 대전협은 대외적 이미지와는 달리 내부적으로는 결속력과 장악력을 지니고 있다고 보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해결책을 강구해 보고자 합니다. 의협과 같이 전공의 협의회 또한 강제 가입 단체로 나가는 것입니다. 강제 가입과 회비의 원천 징수로 훨씬 더 많은 힘과 소속감 결속력을 키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강제력을 바탕으로 노조의 필요성과 우리의 노동자임을 설파하고 동의를 얻는 작업을 할 것입니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걱정이 늘 앞서고 있습니다. 과연 많은 대중 전공의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어떻게 반응 할까? 에 대해 걱정하고 예측하는 시간을 많이 갖습니다.

물론, 많은 대비와 준비를 한다는 것은 중요하고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우는 경계해야할 대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과연 노조로의 전환이 가입 병원의 숫적 감소를 불러일으킬지 아니면 숫적 증가와 영향력의 증대로 나타날지는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 것은 아닐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노조로의 전환에서 어려운 법적, 정서적, 사회적 문제점들을 공론화하고, 해결책을 모색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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