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툴고 투박했던 나날들을 거쳐 지금의 내 모습을 이루기까지 감정은 없어서는 안 될 요소였다. 물론 감정이 이성을 지배하게 둘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흔히 감정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것과 달리 결국 감정도 이성만큼이나 나를 성장시켰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한 인간의 인성과 정체성이 유아기에서 청소년기에 걸쳐 완성되듯, 의료인으로서의 인성과 정체성은 의대생과 젊은 의사 시기에 본격적으로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는 환자를 마주하는 실제 경험과 의료 현장의 가치관이 몸에 스며드는 시기이며, 전문직으로서의 사명감과 윤리가 뿌리내리는 결정적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 의과대학에서는 자라나는 의대생들을 어떻게 가르칠까?
최소한 지금까지 필자가 느껴온 의과대학의 생활은 끊임없이 이성을 훈련시키는 과정이다.
증상과 징후를 분석하고, 검사 결과를 해석하며, 여러 개의 질환 후보군 속에서 최종 진단을 위해 가능성을 좁혀 가는 훈련 속에서 감정은 종종 방해 요소처럼 느껴지곤 한다. 하지만 환자의 눈물이 우리를 흔들고, 복도에서 가족의 흐느낌과 걱정이 귀에 메아리칠 때가 있다. 이럴 때면 어느 선배에게 들어왔던 ‘의사는 냉정해야 한다’는 조언이 실질적으로 가능한지에 관해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감정은 적절한 진료의 적일까?
병원에서 마주한 수많은 순간은 나에게 다른 이야기를 속삭였다. 나는 국제성모병원 응급실 조기 임상실습, 연세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외상외과 실습, 국립중앙의료원 서울권역외상센터 견학을 다녀온 바 있다. 첫 심정지 환자를 만났을 때, 처음으로 응급실 바닥에 혈액이 뚝뚝 떨어지는 외상 환자와 마주친 순간을 선명히 기억한다.
의대생과 젊은 의사 시절은 기억의 절편이 감정의 형태로 직격탄처럼 가슴에 꽂히는 시기다. 의사로서의 첫발을 내디디는 경험들은 단순히 한 줄의 의료 기록과 새로운 임상 지식으로 축적되는 게 아닌, 감정이라는 매개체로 우리 기억 속에 각인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한 사람의 의료인으로서의 윤곽을 그리게 된다.
감정이 단순한 흔적을 넘어 기억을 살아 숨 쉬게 하고, 그 기억이 다시 의료인으로서의 토대를 단단히 다지기에 감정을 외면한 채로는 환자와의 관계도, 의료인이라는 신분으로서 나 자신도 온전히 설 수 없다.
그럼에도 의사는 현대 의학의 정점에 서 있는 직업이기에,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이를 슬기롭게 ‘다루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감정을 정확히 인식하고, 한 발짝 물러서서 그 의미를 해석하는 힘. 이렇게 하면 감정은 판단을 해치는 변수가 아닌, 환자를 향한 설득력과 신뢰를 만드는 도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한 가지 또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의료 행위는 자칫하면 부정적인 감정 속에 사로잡히기 쉬운 구조이다.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과 함께하는 것이 마냥 희망적이고 긍정적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환자들을 위해 적재적소에 올바른 감성을 끄집어내 쓰기 위해 의료인은 반드시 본인이 지켜야 하는 감정의 선을 정확히 인식하고, 이를 위해 때로는 긍정적인 감정을 보충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 마치 내가 실습에서 환자들을 마주하며 느꼈던 따스한 의지를 담은 감정을 글로 눌러 담아 가끔 읽어 보며 다시금 다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고찰하는 시간을 가져보고 나니 감정은 결코 억누르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감정은 환자와 더 깊이 연결되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강력한 통로가 될 수 있다. 그 연결이야말로 의사가 지닌 기술과 과학이라는 가치에 사람다움이라는 따스함을 더해준다.
이쯤에서 내가 읽었던 한 구절을 공유해 볼까 한다.
젊음은 서툴고 투박해야 하며,
사랑은 해맑고 촌스러워야 한다.
젊은 의사로서의 삶은 이성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수술실의 긴장 속에서, 응급실의 소란 속에서, 병실의 고요 속에서 우리 의료인을 지탱하는 것은 결국 ‘감정을 잃지 않는 용기’라고 생각한다. 그 감정이 때로는 서툴고 투박하더라도, 때로는 해맑고 촌스러워 보일지라도,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온전한 의료인이 되게끔 만드는 힘이다.
중요한 것은 이 감정들을 숨기지 않고, 환자를 향한 진심으로 다듬어 나가는 과정이다. 그렇게 쌓인 마음들은 언젠가 차분히 빛을 발하며, 환자의 곁에서 한 사람의 인격과 전문성을 함께 품은 의사로 우리를 성장시킬 것이다. 결국 온전한 의료인이란 지식과 기술에 더해 따뜻한 감정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일 테니까.
그래서 내가 걷는 이 길은 서툴고 투박한 감정을 지켜내어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사람다운 의사가 되기 위한 여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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