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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와 히포크라테스

박대환교수
발행날짜: 2008-11-27 09:13:48

박대환 교수(대구가톨릭의대)

비행기 한 대가 긴 연기를 뿜으면서 날아가고 있다.

문득 마음 한 구석에선 가슴 싸한 비행기와 모녀에 대한 기억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떠오른다. 이십여 년이 흘러버린 이야기이지만, 내게는 아직도 엊그제 일 마냥 선명하다. 그것은 의사로서의 삶에 나침반과 같이 소중한 기억이기도 하다.

그 해 늦은 봄 어느 날, 경부고속도로의 짙은 안개 때문에 큰 사고가 났다. 그 사고로 온 몸에 심한 외상과 골절상을 입은 어린이 한 명과 가벼운 부상을 입은 여자 한 명이 응급실을 통해 입원했다. 아이는 중환자실로, 어머니는 응급실에서 얼굴의 상처를 봉합한 후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신경외과에서는 아이가 심한 뇌손상 때문에 사망하거나 식물인간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운전 중이던 아버지는 사망했고 뒷좌석에 타고 있던 아이의 어머니는 너무나 급작스럽게 당한 사고인지라 운전석 옆에 타고 있던 아이를 챙길 겨를이 없었다.

며칠 후 신경외과에서는 뇌출혈 제거 수술을, 우리 과에서는 얼굴뼈 골절 수술을 실시하였다. 다음 날 회진하러 들어가니 아이 옆에 어머니가 장난감 비행기를 들고 아이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일반 병실에 입원해 있었지만 아이가 걱정이 되어 중환자실에서 24시간 그렇게 장난감 비행기를 든 채로 아이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이가 비행기를 너무 좋아한다고 했다. 비행기 조종사가 되는 것이 그 아이의 소원이었다. 그 아이는 장난감 가게에서도 비행기외의 다른 장남감은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했다. 자기가 이 비행기를 들고 있으면 아이는 비행기가 보고 싶어 벌떡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그 후에도 몇 번 회진하러 갈 때마다 비행기를 든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아이의 얼굴 골절 치료가 거의 끝나고 나의 중환자실 출입도 뜸해졌다. 그러나 아이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고 상태 또한 더 나빠졌다. 수술 후 약 3주 쯤 지난 어느 날 아이는 혈압이 떨어지고 고열과 함께 백혈구가 2만을 넘기 시작하면서 패혈증에 빠져 사망하고 말았다.

워낙 어린 환자라 잠시 불쌍한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다시 반복되어지는 바쁜 생활에 묻혀 그 모자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희미해져 갈 무렵의 그 해 가을날, 딴 환자의 회진을 돌기 위해 중환자실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한 여인이 한 손에 큰 장난감 비행기를 들고 병실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바로 몇 달 전 세상을 떠난 그 아이의 어머니였다. 나는 “어떻게 오셨습니까?”라고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그녀는 아무런 말없이 나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울먹이며, “우리 애가 이번에 새로 나온 신형 모형 비행기를 가지고 싶다고 해서 사 가지고 왔어요. 근데 우리 아이가 없어요!”

그녀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자식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것 같은 정신적 착란에 빠져 있었다. 간호사들의 말로는 전에도 몇 번이나 비행기를 들고 와선 자기 아이를 찾았다고 했다.

그녀의 흔들리는 어깨를 바라보며, 가슴에서 회한의 덩어리가 올라왔다. 나는 바쁜 일상을 핑계로 진정한 의술이 무엇인지를 잊고 지냈던 것은 아닐까. 아니 의사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따뜻한 배려가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그 때 의대 졸업식 때 힘차게 외쳤던 히포크라테스의 선서 중 한 구절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의 양심과 위엄으로서 의술을 베풀겠노라…….”

그 ‘양심’은 바로 환자의 모든 심적 고통까지 외면하지 않고 치료하는 영혼의 자세이며, ‘위엄’이란 환자와 관계된 모든 고통을 같이 느끼고 환자를 둘러싼 상황이나 주변의 슬픔까지 둘러보며 이를 함께 치유하려고 노력해야 진정한 의사로서의 위엄이 선다는 것을.

이렇게 청명한 봄날, 시리도록 푸른 하늘 위에 날아가는 비행기 한 대가 의사로서의 내 삶과 추억을 되돌아보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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