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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차등수가제를 생각한다

홍성수
발행날짜: 2010-05-24 08:00:42

홍성수 이비인후과개원의사회장

며칠 전 보건복지부 장관 명의의 신종플루 관련 감사 편지를 받았다. 감염의 공포를 무릅쓰고 점심도 거르고 퇴근도 늦추며 친숙한 동네 분들, 학생들, 아가들을 보살피던 일의 보람을 되새기며 쓴 웃음을 지었다. 달랑 편지 한 장. 의무나 자기만족 저 너머 각자의 노고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대가가 정당할 때, 각자 소속된 공동체를 더 아끼고 더 사랑하며 신명이 나지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차등수가제는 2000년도 '준비 안 된 의약분업'강행의 칠삭둥이 사생아로서 이미 폐지되었어야 하고, 빠른 시일 안에 반드시 폐지되어야 마땅한 제도이다.

지난 9년 동안 강제 시행된 이 제도는 1. 각 전문과의 질환과 진료의 특성을 섬세하게 반영하지 않고, 2. 환자 추이의 계절적, 지역적 특성과 차이를 고려하지 않으며, 3. 환자의 진료 선택권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4. 진료 소요 시간은 진료의 질, 환자 만족도와 무관하며, 5. 만족도가 높아 이용 빈도가 많은 의원이 역차별을 당하고 있고, 6. 시간당 진료 건수에서 문제가 더 심각한 종합 병원이 제외되었으며, 7. 의료계 내부의 갈등과 반목 그리고 분열을 조장한 측면이 안타깝고, 8. 시행 후, 1년 안에 고통 분담 차원에서 각 전문과의 피해를 재평가하여 보완하겠다는 제도 도입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과 정책 책임자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2008년 정기 국정감사에서 심재철의원의 문제 제기로 개선의 실마리를 마련하고 2009년 보사연 신영석 박사의 비교적 합리적인 연구 보고로 갈피를 잡아가는가 싶더니, 지난 4월 몇 차례의 논의 끝에 어정쩡한 한낱 소동으로 끝나고 말았다.

시간외 진료(야간진료는 부적절한 용어다. 국가가 정한 주 40시간 이외의 진료가 맞다)분에 대한 차등 적용을 제외한다는 것은 이제 부당한 적용을 그만 둔다는 것이지, 그다지 생색을 낼 항목이 아니다.

구간 조정의 전제조건이라는 전가의 보도, 재정중립도 용어는 그럴 듯 하지만 개선에 필요한 추가재원을 마련하지 않은 체 있는 걸로 너희끼리 아귀다툼하라는 이야기인데, 결국 97%가 웃기 위해 억울하게 피눈물을 흘려야 할 3%의 동료를 의료계 스스로 만신창이 의약분업 제단에 희생양으로 바치라는 것이다. 합리적이고 정의롭고 공평하며 미래지향적인가?

결국은 돈 문제다. 국가가 당연히 건강보험에 투입되어야 할 부담금, 그런 거시적인 이야기는 의사협회의 몫이라 언급을 안 해기로 한다. 다만 재정적으로 감당도 못 하며 각종 정책을 화려하게 강행하면서 오로지 의사들에게 무한희생을 강요하는 빈한한 처사들, ‘의사들만 압박하면 건강보험이 잘 돌아간다’식의 외화내빈, 저비용-고효율의 국제적인 자랑거리란다. 그 속내를 알고 나면 뭐라고들 할까? 한국의사들은 착하다? 한국정부는 대단하다?

건강보험 재정 파탄을 막기 위해 '한시적으로' 도입해 놓은 제도가 궁색한 명분(의료의 질 향상, 의료기관 이용의 합리적인 배분? 설마!)과 왜곡된 가치관(어떤 국민을 위해 또 다른 국민에게 불이익을 강제해도 된다, 누가?), 편향된 선입견(의사들은 다 잘 살고 탐욕스럽다, 진짜?)의 종합 세트로, 과시적-가학적으로 영향력을 즐기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면 너무 지나친 피해망상일까? 그렇다. 의료 공급자의 피해망상 맞다.

공급자 측면에서 예를 들어 본다면, 소수의 유능한 공무원이 좋은 정책을 남보다 많이 쏟아 낼 때, 평균적인 공무원은 절대 그럴 수 없다며 공무원 일인당 정책 제안 수를 정해 놓고, 그 수를 넘기면 정책의 비중과 기여도를 무조건 10%, 25%, 50% 폄하해도 되는 것일까? 합리적이고 정의롭고 공평하며 미래지향적인가?

환자-의료 소비자 측면에서, 독과점이 아닌 한 의료기관 이용 선택권은 오로지 환자에게 있다. 그 기준은 치료 결과 및 진료 전반에 대한 만족도일 수 밖에 없다. 만족도가 높은 의원은 환자가 많을 것이다. 환자가 많은 의원에서는 대기시간이 길다.

현명하고 현실적인 시민이라면 두 가지 선택 즉,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자기가 선호하는 의원에서 치료를 받거나, 기다리는 시간이 아깝다면 덜 붐비는 다른 의원으로 분산될 것이다. 이와 같이 각자 합리적인 선택을 할 때, 비로소 소비자의 욕구충족을 매개로 의료서비스의 질과 적정 환자수가 순기능적 균형점에 도달할 것이다.

요즘 어떤 세상이며 그렇게 위대하고 현명한 국민들이 유독 의원 급 진료에서만 바보멍청이가 되어 공익과 시민 대표들이 걱정을 해야 할 지경이란 말인가? 오로지 재정절감, 돈 문제다. 견강부회를 털어 버리고 솔직해 질 필요가 있다.

의료법 상 75명을 이미 봤다고 일흔 여섯 번 째 환자를 거부할 수도 없지만, 100명이건 200명이건 진료실에 들어선 모든 환자를 최선을 다하여 돌보는 것은 준법의 문제도, 의무도, 돈벌이도 아닌, 의사라는 전문가의 신성한 소명이자 본분이기 때문이다.

저수가 정책으로 건당 진료비 최하위(12,000원) 군에 더하여 과 특성상 진료 환자수가 많다(90여명)는 이유로 9년 이상 최대의 피해자인 이비인후과 개원의사라서가 아니라, 대한민국 의사의 한 사람으로서 차등수가제는 분명 잘못된 제도이기에 철폐되는 그 날까지 차분하고 꾸준하게 노력할 것이다. 던져주는 떡 반쪽 짜리로 희희낙락하지 않을 것이다. 정당한 노고의 대가를 인정할 때까지 오로지 설명하고, 주장하고, 설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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