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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 가는 해외여행Ⅱ

양기화
발행날짜: 2015-10-26 05:04:31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터키로[9]

신이 마련한 도피처, 카파도키아(1)

소금호수를 출발한 버스가 2시간 정도를 달려 일행을 내려놓은 곳은 카파도키아의 지하도시 가운데 하나인 데린쿠유 유적이다. 지하도시를 발견하게 된 계기는 다양하게 설명되는 것 같다. 가이드는 양계장을 하는 사람이 닭이 자꾸 없어지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던 중에 닭이 빠지는 구멍을 발견한 것이 시초라고 하였고, 여행사에서는 길 잃은 양을 찾던 양치기가 발견했다고 설명한다. 그런가 하면 1965년 자신의 동굴집 뒤쪽의 무너진 벽을 청소하던 주민이 우연히 발견했다고 적은 책도 있다.

카파도키아 지역에는 지하 2층이 넘는 지하도시가 최대 200개에 달한다고 한다. 이 지역의 전문가들은 최소 30개에서 최대 300개 정도의 지하도시가 더 있을 것으로 추산하기도 한다. 이들 가운데 규모가 큰 카이막클르(Kaimakli)와 우리가 찾아간 데린쿠유(Derinkuku) 두 곳만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데린쿠유는 카파도키아의 중심지 네브쉐히르(Nevşehir)에서 29km 남쪽에 있다.

지하도시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데린쿠유는 모두 11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깊이는 85미터에 이른다. 맨 아래층에는 수조와 샘도 있어서 지하도시에서 독립적인 생활도 가능했다. 무려 3만 명이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위쪽에는 주거공간이 있고, 마구간과 식품 창고, 심지어는 와인과 기름제조 시설도 갖추고 있었다. 맨 아래층에는 십자가 형태로 만든 교회도 있다.

데린쿠유는 터키말로 ‘깊은 우물’이란 뜻인데, 한때는 ‘어려운 생계’라는 의미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라고비아(Malagobia)라고 부르던 시기도 있었다고 한다. 지하도시가 만들어진 이유도 다양하게 설명되는 것 같다. 기독교도들이 탄압을 피해 숨어살던 곳이라고 하는데, 가이드말로는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지하공간을 넓히기 위하여 파낸 돌을 한밤중에 노새에 실어 지상으로 끌어올려 여기저기 흩뿌려 눈속임을 했다고 설명했다. 심지어는 양가죽을 뒤집어쓴 양치기가 한밤중에 양떼를 지상의 초원으로 몰고나가 풀을 뜯도록 했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극적인 설명이란 느낌이 들었다.

지하도시에서 히타이트 제국의 유물이 발견되기도 해서 기원을 히타이트(Hittites; 기원전 18세기경 ~ 기원전 1180년 또는 기원전 8세기)시기까지 올려 잡는 사람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기원전 7~8세기에 프리기아(Phrygia)인들이 동굴을 짓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Vitruvius)는 “자연 상태 그대로의 언덕을 골라서, 자기한테 편리한 만큼 뚫고 파냈다.”라고 기록했다(1). 이 지역은 화산재가 쌓여서 굳어진 응회암 지대이다.

아나톨리아지역에서는 900만 년 전부터 300만 년 전까지 화산이 활발했고 화산의 분출로 나온 화산재가 수백 미터 두께로 쌓였던 것이다. 이런 지형적 특성을 활용한 프리기아인들은 쉽게 응회암을 깍아 동굴을 파서 생활하게 되었던 것이다.

데린쿠유 지역의 평범한 마을 모습(상), 지하도시의 입구(하).

비좁은 통로(좌), 통로를 차단하는 돌문(우).
기독교가 공인되기 이전의 로마시대에 박해를 피하려는 기독교도들이 프리기아 사람들의 주거방식을 활용하여 지하 동굴에 숨어살았고, 이들이 지하도시를 본격적으로 확장시킨 것은 8세기 무렵부터였다고 한다. 비잔틴제국의 변경에 위치하여 페르시아와 이슬람제국의 잦은 침입으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던 것이다. 데린쿠유 지역을 지상에서 보면 평범한 시골마을로 보인다. 출입구나 환기구는 지상에 있는 집안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다.

지하도시는 기본적으로 방어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데 지하도시의 통로에 들어서면 허리를 굽혀야 겨우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좁고 곧 지하통로를 차단하는 커다란 돌문이 나타난다. 둥글게 생긴 돌문은 바깥쪽은 매끄럽게 만들어졌지만, 안에는 홈을 만들어 쉽게 굴려 통로를 막을 수 있도록 했다.

돌문의 지름은 1~1.5m이고 두께는 30~50cm에 무게가 무려 200~500kg에 달하기 때문에 밖에서는 열 수 없었을 것이다. 돌문 뒤에는 다른 지하도시로 통하는 통로가 만들어져 있는데, 데린쿠유와 카이막클르로 연결하는 지하통로는 길이가 7km에 이른다고 한다.

지상에서 빛을 끌어들이는 창(상), 지상에 위장된 환기창(하).
가이드는 지하도시에서 무려 5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생활했다고 설명하지만 쉽게 이해되지 않는 구석도 있다. 실제로 좁은 통로를 따라 지하도시로 내려가 보면 주거공간이라는 곳이 너무 협소해서 가족들이 들어서면 움직이기에도 불편할 정도이다. 환기구를 여러 곳에 설치했다고는 하지만, 전기도 없었을 당시에는 어둠을 밝히기 위하여 사용했을 호롱불이나, 밀집된 사람들이 내뱉는 숨으로 혼탁해진 공기를 정화한 방법도 궁금하다. 예배를 보던 장소도 여러 곳으로 분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외부로부터 빛을 끌어들인 교회는 지하 1층으로 보이고 지하 깊은 곳에도 교회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공간은 생각보다 넓지 않다. 수만 명의 신도들이 거주하고 있었다면 예배를 보는 일이 중요했을 것이다. 잘해야 일이십 명이 들어설 수 있는 교회공간에서 예배를 통하여 집단의 일체감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이 공간은 거주를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외적이 갑자기 침입해왔을 때 일시적으로 피난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데린쿠유의 지하도시는 박해를 피해 온 기독교인들이 3세기에 정착해 7세기까지 살았던 곳(2)” 혹은 “이렇게 어둡고 답답한 곳에 숨어서 평생을 살면서 그들이 지키고자 한 신앙의 힘은 어디까지 일까(3)”라는 느낌을 적고 있는 것처럼 데린쿠유를 찾은 사람들 가운데 지하도시가 건설된 시기와 기독교의 탄압이 있던 시기를 헷갈리는 탓이 아닌가 싶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의 오스만제국과 뒤를 이른 터키공화국이 기독교도를 탄압한 것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데린쿠유의 입구 부근에 그리스 정교회 건물이 있기 때문인 듯하다. 이 지역에서 그리스 정교회가 물러난 것은 1922년에 끝난 그리스왕국과 오스만제국의 전쟁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에 참여한 그리스왕국은 전승국이 되었고, 주축국에 참여한 오스만제국은 패전국이 되었다. 세브르조약(1920년 8월 20일)에 따라 오스만제국은 아나톨리아의 이즈미르 지역을 그리스에 내주었다.

그런데 영토를 확대하려는 야심을 품은 그리스가 1921년 오스만제국 내에 거주하는 자국민의 보호를 빌미로 전투를 시작하여 앙카라 외곽 40km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무스타파 케말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군은 1922년 9월 사카리아 강 전투에서 그리스군을 대파하여 아나톨리아에서 쫓아냈다. 이 전투 이후 그리스왕국과 오스만제국이 무너지고 각각 공화국이 들어섰다.

그리스와 터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강화회의에서 그리스는 전쟁 전에 확보했던 이즈미르 지역을 포기하는 대신 터키연안의 에게해에 흩어져 있는 섬들을 획득하게 되었다. 동시에 그리스와 터키 양국은 상대의 영토에 살던 주민을 교환키로 했는데, 그리스에 살던 무슬림은 터키로 터키에 살던 그리스정교도 주민들은 그리스로 추방되었다(4).

이런 역사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터키에 흩어져 있는 기독교의 유적들은 무슬림의 탄압으로 기독교가 핍박을 받았다는 식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사실 오스만제국은 점령지역의 이교도(무슬림이 아닌 타종교 신도)를 군대에 징집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에 대신할 세금을 걷었던 것이다. 오스만 입장에서는 세금을 내는 이교도들을 핍박해서 국외로 쫓아낼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참고자료

(1) 엘러스테어 보네트 지음. 장소의 재발견 93쪽, 책읽는 수요일, 2015년
(2) 안효원 지음. 고맙습니다 196쪽, 이야기쟁이낙타, 2011년
(3) 장은정 지음. 언젠가는 터키 124쪽, 리스컴, 2013년
(4) 위키백과. 그리스-터키 전쟁 (1919년 ~ 19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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