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도 의료계를 뒤흔드는 여러 법원 판결이 나왔다. 의료분야에서 법원의 판단은 이제 단순한 분쟁 해결을 넘어, 의료제도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지표로 거듭나고 있다.
특히 올해는 의료사고로 인한 손해배상뿐 아니라 의사 면허 및 한의사와 간호사의 의료행위 범위 등 다양한 사안에 걸쳐 의미 있는 판결이 발표되며 의료계의 주목을 받았다.
사법부의 판단이 갈수록 의료계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고 있는 상황 속, 메디칼타임즈가 올해 이슈가 됐던 법원 판결을 정리해 봤다.
■ 필수의료도 고액배상…"의료계 현실 고려해 정교한 기준 필요"
올해는 의료과실과 관련해 의사의 책임을 엄격하게 다루는 판결이 다수 발표됐다.
우선,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지난 9월 고관절 수술 후 폐색전증으로 미국인 환자가 사망한 사건과 관련해 의사에게 4억2000만원의 배생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환자가 백인 남성으로 폐색전증 고위험군임에도 추가 검사나 위급상황 시 대처 방법을 안내하지 않고 퇴원시켜 의료과실이 인정된다는 판단이다.
또한 종교적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는 환자에게 뇌심부자극술을 시행했지만 부작용으로 뇌출혈이 나타나 환자가 사망한 일과 관련해서도 의사에게 4억5000만원의 배상책임이 인정됐다.
필수의료 분야와 관련해서도 고액의 배상 판결이 나왔다.
심장수술 후 10여 분간 심정지가 발생해 식물인간 상태가 된 환자와 관련해 수술을 진행한 흉부외과 의사측에 2억원의 배상책임이 있다는 판결이다.
이외에도, 눈매교정술 후 토안증 부작용이 나타나자 성형외과 전문의에게 1300만원, 인공관절 재수술에서 동맥 손상을 놓쳐 환자가 하지를 절단한 사건으로 의사에게 9000만원의 손해배상책임이 있다는 판결 등이 발표됐다.
의료계는 해를 거듭할수록 의사 개인이 책임지기 어려운 수준으로 배상액 규모가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의료법학회 김장한 회장은 "과실이 명백한 경우 처벌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의료사고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면 의사들이 적극적인 의료행위를 꺼리게 될 뿐 아니라, 환자와 의사 간 신뢰관계 역시 무너진다"고 강조했다.
이어 "법원은 의사의 권리와 의무를 명확히 규정하고 의료제도 발전을 고려하며 환자 보호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며 "의료계의 현실을 반영해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진 법적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진료 및 수술과정에서 의사의 과실이 없다고 판단됐음에도 손해배상책임이 인정된 사례도 있었다. 환자에게 설명의무가 미흡했다는 이유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정맥 폐색술 이후 부작용으로 심부정맥혈증이 나타난 환자와 관련해, 대학병원 외과 교수에게 300만원의 손해배상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술기상 과실은 없었으나 장기간 운전경력이 있는 환자에게 심부정맥혈전증 발생위험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지 않아 환자의 선택권을 침해했다는 판단이다.
가슴에 삽임된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환자에게 레이저 흡입술을 실시했지만 환자가 유방함몰 등 상해를 입은 사건과 관련해서도 의사에게 설명의무 위반으로 500만원의 배상책임이 인정됐다.
이에 대해 대한의사협회 관계자는 "수술과 그 후 처치에 대해 아무런 과실이 없다고 인정받았음에도 설명의무나 서류작성의 미진함 등을 이유로 배상 책임을 인정한 것은 의사에게 가혹한 측면이 있어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어 "수술이 환자에게 적절했고 그 과정에 의사가 최선을 다해 과실이 없다면 의사에게도 일정 부분 면책이 적용돼야 한다"며 "하지만 점점 배상규모가 커지고 있어 의료계 발전을 위해 균형 잡힌 사법부 판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산부인과 23억원-소청과 14억원 손해배상청구…법원 '기각'
의사에게 과실이 없다고 판단된 사례도 있었다.
인천지방법원은 저산소증으로 뇌병변 장애 판정을 받은 신생아의 보호자가 산부인과 전문의에게 제기한 23억원 상당의 손해배상소송을 기각했다. 분만 및 이후 응급처치에서 의료진 과실이 없다는 판단이다.
소아의 뇌수막염 진단이 늦어져 인지기능 저하 및 뇌전증 부작용이 나타난 사건과 관련해서도 1심과 2심 재판부 모두 14억원 상당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신경학적 증상 없이 단순 발열과 처짐, 복통, 구토, 피부발진 등의 증상만으로는 초기에 뇌수막염을 의심하기 어렵다"며 "소아 진단 및 응급처치, 집중치료실에서 의사의 과실을 인정할 충분한 근거가 없다"고 판시했다.
이 외에도 코로나19에 감염 후 입원 치료 중 심부전으로 신생아가 사망한 사건과 관련해 법원은 의료진에게 과실이 없다고 판단했다.
의료분쟁조정중재원과 법원 판단이 다른 사례도 있었다.
태반조기박리로 태아가 자궁 내에서 사망한 사건과 관련해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은 의사 과실을 인정해 1500만원 상당의 위자료 지급을 권고했지만, 법원은 의사에게 무죄판결을 내린 것.
법원은 "태동 검사와 관련해 진단과 처치 상 의사의 일부 잘못이 있어 보이지만 태아 사망과 관련해 직접적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며 "또한 태반조기박리는 미리 예방하거나 회피할 수 있는 질환이 아니라는 점 등을 고려해 판단했다"고 밝혔다.
의료계 관계자는 "소아와 연관된 산부인과와 소아청소년과는 의료사고가 발생했을 때 다른 진료과목에 비해 특히 배상액이 높게 나오는 경우가 많다"며 "열악한 근무환경 못지않게 사법 리스크가 산부인과와 소아청소년과의 기피원인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한순간의 실수로 개인에게 수십억원 규모를 모두 책임지라는 것은 해당 분야를 떠나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며 "분만사고 배상 국가 책임제 전환 등 의료진을 보호할 수 있는 실질적 지원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의사만 가능하던 의료행위 '한의사·간호사' 확대…"기조 이어질 것"
이외에 한의사와 간호사의 업무범위와 관련된 재판 결과 또한 연이어 발표되며 의료계 주목을 받았다.
대법원은 지난 6월 한의사의 초음파 진단기기 사용이 합법하다는 최종 판결을 내렸다.
환자의 진료 과정에서 약 2년 동안 68회 초음파 검사를 진행한 한의사 A씨에 대해 1심과 2심은 의료법 위반죄 등을 이유로 유죄 판결을 내렸으나 대법원이 이를 뒤집은 것이다.
대법원은 초음파 진단기기가 방사선을 방출하지 않고 기술적으로 안전하다는 이유만으로 한의사의 해당 기기사용이 보건위생상 치명적인 위해가 있지 않다고 판단했다.
또한 최근 의사만 할 수 있다고 여겨졌던 골수 검사를 숙련된 간호사도 수행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발표되며 의료계를 충격에 빠트렸다.
대법원은 "의료법은 의료인을 의사·간호사 등 종별로 엄격히 구분하면서도 의료인 상호 간 업무 영역과 면허 범위에 대해서는 규정을 두지 않았다"며 "이는 의료행위의 종류가 매우 다양하고 그 개념도 의학의 발달과 사회의 발전, 의료서비스 수요자의 인식과 요구에 따라 변화될 수 있음을 감안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골수 검사는 의사만이 할 수 있는 진료행위 자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며 "자질과 숙련도를 갖춘 간호사 또한 진료의 보조행위로서 진행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사법부 판단은 내년 6월부터 시행 예정인 간호법과 맞물려 의사만이 할 수 있는 고유의 의료행위 범위를 좁혀가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의료계에 정통한 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간호사 업무범위 확대에 관한 중요한 법적 기준을 제시한 의미 있는 판례"라며 "의료기술이 발전하면서 행위가 다양해지고 한정적 의료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의사에게만 허용되던 의료행위가 점차 타직역까지 범위를 넓혀가는 경향을 보인다"고 밝혔다.
이어 "골수검사는 그동안 고도의 전문성과 경험이 요구되는 의료행위로 의사만이 할 수 있다고 간주됐는데 간호사에게 허용한 것은 간호사도 일정 교육이나 자격을 갖추면 의사와 같은 수준으로 치료 행위를 할 수 있다고 인정한 것"이라며 "전통적으로 의료행위를 보조하는 역할에 그치던 간호사가 의료행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됐다. 향후에도 이러한 기조는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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