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비밀번호 변경안내 주기적인 비밀번호 변경으로 개인정보를 지켜주세요.
안전한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3개월마다 비밀번호를 변경해주세요.
※ 비밀번호는 마이페이지에서도 변경 가능합니다.
30일간 보이지 않기
  • 병·의원
  • 개원가

"자코메티, 장욱진처럼?"(133편)

발행날짜: 2025-03-24 05:00:00

백진기 한독 대표

형이 조각가라 어려서부터 그림과 조각에 많이 노출됐다.
그 덕분에 자연스럽게 미술을 보는 눈이 길러졌다.
어디를 가든 미술관과 박물관은 꼭 방문했다.

회사에 들어와 보니 의약학박물관이 있었다.
박물관장(후에 허준박물관장, 박물관협회장)이 혼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바쁘게 움직였다.
관장이 외부 행사에 참석하면, 박물관에 온 관람객들에게 유물을 소개할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관장이 내 보스와 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처삼촌(당시 경희대박물관장)까지 언급하며,
"일 년에 몇 번 되지 않을 겁니다. 혹시 제가 없을 때 관람객이 오면 대신 유물을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당시는 시간이 천천히 흐르던 1980년대였다.

나는 관장이 유물을 설명하는 내용을 녹음해 반복해서 들었다.
그 덕분에 대타로 관람객들에게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 년에 몇 번'이 아니라 '한 달에 몇 번'이었다.
<박물관법>이 제정되면서 지금은 흔적도 사라진 광화문 국립박물관에서 학예사 교육도 받았다.
인사 업무도 재미있었지만, '박물관학 전공'을 위해 유학을 꿈꾸기도 했다.
그러나 처삼촌의 애매한 반응과 경제적 문제로 바로 접었다.

유물과 미술작품을 보면서 나름대로 '취향'이 생겼다.
화려하고 섬세하게 표현된 유물보다는 백자처럼 단순하고 은은한 유물을 더 좋아한다.
미술작품을 보는 눈도 비슷하다.
자코메티와 장욱진의 작품을 좋아하고, 형의 작품도 초기작보다는 최근 작품을 더 좋아하는 이유가 같다.

스위스 출신 조각가 자코메티의 작품은 고등학교 미술 교과서에서 처음 만났다.
보통의 구상 조각들은 크고 근육 등을 섬세하게 표현했지만, 자코메티의 작품은 유독 가늘고 길었다.
그는 사람의 모습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요소를 버리고, 떼어내고, 군더더기를 제거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결국 남겨진 최소한의 형태가 그의 작품이었다.
그의 작품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가 어떻게 부르델의 화실에서 배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장욱진의 그림도 마찬가지다.
그의 작품은 늘 엽서 크기(1호)보다 약간 크고, 표현은 간결하다.
"왜 2~4호 크기로만 그리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림을 그리는 데 크기가 무슨 상관인가.
나는 조형성을 추구하는데, 이 정도 크기면 충분하지.
크게 그리다 보면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게 된다.
그리지 않아도 될 것을 그리게 되지.
하지만 작은 그림을 그리면 내가 꼭 그리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더 깊이 생각하게 된다.
괜히 화폭과 물감을 낭비하지 않아서 좋다.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내게 필요한 크기가 이 정도일 뿐이다."

연말연시가 되면 누구나 생각이 많아진다.
새해에는 이것저것 꼭 해야지 하며 결심하게 된다.
나는 작년(2024년) 연말에 자코메티와 장욱진, 그리고 이조백자를 떠올리며 카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카드를 연하장 대신 친구들에게 보냈다.

회사 일도 마찬가지다.
엄청난 정보량과 쌓여가는 업무에 허덕이고 있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일이 끝없이 밀려오고, 발등의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다.
새해가 되면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KPIs도 꼭 달성해야 한다는 요구가 넘쳐난다.

하지만 연초에는 무엇을 하겠다보다 무엇을 안 하겠다, 즉 *폐기(Unlearning)*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래야 새 목표, 새 결심, 새 KPIs를 담을 공간이 생긴다.
자코메티와 장욱진처럼 표현하고 싶은 것만이 내가 할 일이 되어야 한다.
올해는 군더더기 없는 방식으로 일하고 싶다.

자코메티, 장욱진, 그리고 이조백자를 만든 이들은 진정한 고수 중의 고수다.

댓글
새로고침
  • 최신순
  • 추천순
댓글운영규칙
댓글운영규칙
댓글은 로그인 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으며 전체 아이디가 노출되지 않습니다.
ex) medi****** 아이디 앞 네자리 표기 이외 * 처리
댓글 삭제기준 다음의 경우 사전 통보없이 삭제하고 아이디 이용정지 또는 영구 가입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1. 저작권・인격권 등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
2. 상용프로그램의 등록과 게재, 배포를 안내하는 게시물
3. 타인 또는 제3자의 저작권 및 기타 권리를 침해한 내용을 담은 게시물
4. 욕설 및 비방, 음란성 댓글
더보기
이메일 무단수집 거부
메디칼타임즈 홈페이지에 게시된 이메일 주소가 전자우편 수집 프로그램이나
그 밖의 기술적 방법을 이용하여 무단으로 수집되는 것을 거부하며,
이를 위반할 시에는 정보통신망법에 의해 형사 처벌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