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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 밖의 사람을 만나는 연습

부산의대 본과 3학년 고윤성
발행날짜: 2026-10-19 0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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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학교 의과대학 본과 3학년 고윤성

어릴 적의 나는 사람을 꽤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봤던 것 같다. 친구의 버릇이나 동네 어른의 말투, 그 사람이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같은 것들이 궁금했다. 그런데 학년이 올라가고 나를 설명하는 수식어가 하나둘 늘어나면서,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 역시 수식어로 먼저 읽기 시작했다. 어느 학교, 무슨 전공, 어떤 직업. 그 사람이 궁금해지기도 전에 그 사람에 대한 텍스트가 먼저 도착했다.

실습에 나와서는 더 그랬다. 환자를 만나기 전에 EMR부터 열었다. 진단명, 복용 중인 약, 최근 검사 수치를 확인했다. 만성질환 관리가 잘 되지 않아 다시 병원을 찾은 환자의 차트를 보면 솔직히 답답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목표 수치도 정해져 있고 지켜야 할 생활수칙도 분명한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싶었다.

그 답답함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환자분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면서였다. 심장이 나빠진 한 할아버지는 평생 운동을 낙으로 삼아 오신 분이었는데, 이제 마음껏 움직이지 못한다는 사실이 병 자체보다 더 큰 스트레스라고 하셨다. 차트에는 심장 기능을 나타내는 수치와 약 이름이 빼곡했지만, 그분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는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환자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

실습 중 만난 한 교수님은 원래 심장을 전공하셨다. 심장 시술을 하던 시절, 교수님의 환자들이 자꾸 대동맥 문제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교수님은 미국으로 건너가 혈관외과에서 대동맥 치료를 배워 오셨고, 돌아와 환자들의 생존율을 끌어올리셨다. 그 뒤로도 환자에게서 새로운 문제가 보이면 국내에 전례가 없더라도 일단 부딪혀 가며 방법을 찾으셨다. 그렇게 쌓인 고민은 결국 스텐트 개발로까지 이어졌다.

그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 "절대 환자 곁을 떠나지 말고 끝까지 옆에 있어야 한다. 환자가 의사의 스승이다" 처음에는 환자를 끝까지 책임지라는 당부로 들었다. 그런데 교수님이 걸어온 길을 듣고 나니 조금 다르게 들렸다. 교수님이 풀어야 할 다음 문제는 언제나 눈앞의 환자에게서 나왔다. 대동맥도, 스텐트도 교과서가 아니라 환자가 낸 문제였다. 의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이미 자신이 진료하는 환자들 안에 담겨 있고, 그래서 환자에게서 멀어지는 순간 문제도 풀 수 없게 된다. 내게는 그 말이 의사가 임상을 떠나지 말아야 하는 이유로 들렸다.

물론 나는 스텐트를 만들 수도, 새로운 술기를 배워 올 수도 없는 학생이다. 다만 환자에게서 멀어진다는 게 꼭 병원을 떠나는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니터 앞에 앉아 숫자와 영상으로만 환자를 보는 것도 어쩌면 환자에게서 멀어지는 한 방식일지 모른다.

템플릿 너머의 질문

돌아보면 실습 초반의 나는 딱 그만큼 멀리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공부할 것도, 제출할 과제도 많았다. '나는 어디까지나 학생 의사니까'라는 안일한 생각도 있었다. 피곤한 날에는 실기시험을 보듯 템플릿에 박힌 질문만 던지고 문진을 마쳤다. 그 사람을 이해하기보다 케이스 발표 슬라이드와 의무기록지의 정해진 칸을 채우는 데 급급했다.

외래에서 만난 한 천식 환자분은 높은 지대의 주택에 산다고 하셨다. 그날 외래를 마치고도 그분은 집에 가기 위해 그 오르막을 올라야 했을 것이다. 차트 속 '조절되지 않는 천식'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구체적인 하루가 되었다.

흡입기를 제대로 쓰고 계신지, 증상이 언제 심해지는지는 템플릿에도 있는 질문이다. 하지만 숨이 차는 순간이 매일 집 앞 오르막에서 찾아온다는 걸 알고 나면 같은 질문도 다르게 던질 수 있다. 흡입기를 언제 쓰면 좋을지, 그 길을 오를 때 무엇이 가장 힘드신지, 그분의 하루에 맞춰 물을 수 있다.

그래서 EMR을 읽는 방식부터 바꿔 보려 한다. 지금까지 EMR이 환자를 텍스트로 바꾸는 창구였다면, 이제는 환자를 만나러 가기 전에 그분의 삶을 미리 짐작해 보는 단서로 읽고 싶다. 진단명과 수치 사이에 적힌 직업, 사는 곳, 함께 사는 가족, 지난 입원 때 남겨진 간호기록 한 줄 같은 것들이다. 학생 의사이기 때문에 오히려 시간을 들여 그런 것들을 찾아보고, 그것을 실마리 삼아 질문을 건넬 수 있다. 의학 지식은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 알려 주고, 그 사람의 삶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물어야 하는지 알려 준다. 둘 중 하나만으로는 그 오르막에 닿을 수 없다.

병원 밖에서 배우는 것

올해 초부터 부산 지역 어르신들을 찾아가는 의료봉사에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그곳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당뇨를 20년 넘게 앓아 오신 분이었다. 이제는 소변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하셨고, 어딘가에 부딪힌 것만으로 갈비뼈가 부러진 적도 있다고 하셨다. 신장이 망가지면서 뼈까지 약해진 CKD-MBD 상태로 보였다. 공막과 피부는 누렇게 떠 있었고, 몸이 자꾸 가렵다고 하셨다. 강의실에서 하나씩 배운 합병증들이 한 사람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약도 잘 챙겨 드시지 않는 편이었다. 차트로만 만났다면 나는 아마 또 그 답답함부터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할머니는 우리가 무슨 검사를 하는지보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앉아 있다 가는지에 더 관심이 있어 보였다. 손자 손녀가 놀러 온 것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셨고, 우리가 조금 더 머물다 일어서던 그 시간이 그날 할머니에게는 가장 행복한 순간처럼 보였다.

그 장면 앞에서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하나는 의대생으로서의 걱정이었다. 할머니의 몸은 대화 한 번으로 나아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약을 거르는 건 분명 위험한 일이었다. 다른 하나는, 어쩌면 약을 잘 드시지 않는 이유도 그 적적함과 무관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찾아오는 사람 없이 혼자 약봉지를 뜯는 하루와, 누군가 와서 안부를 묻고 가는 하루는 같은 약이라도 무게가 다를 것이다. 순응도는 설명을 한 번 더 한다고 올라가는 숫자가 아니라, 결국 그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서 출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병원에서 나는 '학생 의사'라는 자리에 서 있지만, 봉사 현장에서는 같은 지역에 사는 한 사람으로서 어르신들과 마주 앉는다. 그 자리에는 정해진 문진 순서가 없다. 그래서 더 어렵고, 그래서 더 많이 배운다.

솔직히 나는 말을 조리 있게 하는 편도 아니고, 사람과 쉽게 친해지는 성격도 아니다. 그래서 요즘은 배우는 중이다. 환자분들에게 배우고, 누구와도 금세 가까워지는 친구에게도 묻는다. 아이들과는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아저씨나 아주머니, 할머니와 할아버지께는 어떻게 하면 편하게 말을 건넬 수 있는지. 지금은 주로 비슷한 길을 걷는 또래들과만 지내지만, 병원 밖으로 나가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일을 멈추지 않으려 한다.

교수님은 환자 곁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다. 지금의 나에게 그 말은 모니터 속 숫자와 영상에서 일어나 환자 옆으로 가라는 말이다. 오르막 위의 집과 혼자 남은 할머니의 오후까지 들여다볼 수 있을 만큼 환자의 삶 가까이에 서라는 말이다.

의학 지식은 앞으로도 계속 쌓아 가야 하겠지만, 그 지식을 실제로 한 사람에게 닿게 하는 건 결국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적의 나는 수식어보다 사람이 먼저 궁금했다. 이제는 그 시선을 의학이라는 언어와 함께 되찾는 연습을 하고 있다. 아직 서툴지만, 다음 외래에서는 진단명보다 사회력 칸을 먼저 열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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