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한 지역신문 기사내용이다. 이학적 검사와 시스템 리뷰와 수많은 정상소견들이 잘 정리된 진료기록지를 살펴 본 한 의사가 감탄한다. “와, 놀랍네요! 정말 훌륭한 진료기록입니다. 이 모든 진찰과 문진 결과들을 다 상세히 기록하셨군요. 그리고 이 많은 진찰에 15분밖에 안 걸리셨네요?” 기록을 작성한 의사의 답이다. “그럴 리가요? 컴퓨터에서 전자 템플릿으로 자동입력한 거지요!”
아직까지 진료기록의 질을 과학적으로 계량화한 연구보고는 없지만, ‘Copy/Paste’나 ‘자동 템플릿’으로 생성된 진료기록을 신뢰하기는 어렵다. 기록의 질 저하는 진료의 질 저하로 이어진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의료정보 시스템 도입의 가장 큰 장애물은 의사의 입력시간 증가다. Poissant 등(2006)의 연구에 따르면 정보화로 의사의 의무기록 입력시간은 98~328%까지 증가됐다고 한다. 의사들은 바쁘다. 회사들은 입력속도 향상 프로그램을 공급한다.
‘Default’와 ‘Copy/Paste’는 장황한 문서를 출력해주지만 의사들은 그 문장을 읽어보고 환자별로 수정보완할 시간이 없다. 단순 검토 시간조차 없다. 부정확하거나 진찰중에 물어보지도 않은 내용들도 진료기록에 출력되고 서명된다.
더 큰 문제는 의료비 지급기준이 진료기록 내용이라는 점이다. 결국 대부분의 시스템은 “최대청구”를 위한 “최대기록”을 “Default”로 생성해낸다. 2005년 미국 ONC (Office of National Coordinator for Health IT) 보고서에 따르면 이렇게 해서 늘어난 비용부담이 2003년도에만 510~1700억불이며, 정보화에 따라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많은 사람들은 의료정보 시스템의 도입이,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의료서비스 전달 효율성을 높이고, 의료의 질 향상과 비용절감을 가져오리라 믿는다. 중복검사 감소, 약화사고 방지, 적절한 예방치료 제공, 정보교류를 확대 및 근거중심의학을 실현할 가능성 등이 그 기전으로 제시된다. 수십 년간 의료정보학계가 추구해온 목표들이다.
언젠가는 이루어 질 꿈들이다. 그렇다면 현시점에서는 어떨까? 놀랍게도 많은 연구에 의하면 진료의 질향상이나 비용절감의 증거가 아직 뚜렷치 않다는 것이다. 개별 보고마다 차이가 있지만, ‘체계적 리뷰’를 수행한 논문에서는 보고내용들이 상반되며 아직 인정할 만한 뚜렷한 효과는 없다는 것이다(Chaudhry 등, 2006; Annals of Internal Medicine, Linder 등, 2007; Archives of Internal Medicine, Eslami 등, 2007; JAMIA).
역설적으로 정보시스템이 비용증가와 질저하를 유발했다는 논문들 중에는 의사결정지원 시스템이 새로운 유해사고를 생성해낸 경우도 있고, 컴퓨터 가이드라인이 ‘붕어빵 의료 (cookbook medicine)’ 양산으로 질저하를 가져온다는 보고도 있다. 게다가 정보집중에 의한 개인정보 침해는 심각한 한계 상황이다. 정보보호를 위한 적절한 대응체계 마련을 위해서는 현재보다 두 배 이상의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연구결과들은 초기의 랜드보고서(2005)와 CITL보고서(2004)가 정보화를 통한 비용절감이 연간 800억불에 이를 것이라는 주장과 상반된다. 논쟁이 뜨거워졌다. 결국 미국 의회 예산국의 2008년 보고서가 이 문제를 중립적으로 다루었다.
그에 따르면 랜드보고서는 부정적 효과를 보고한 연구들은 배제하고 긍정적 효과를 보고한 논문만 모아 예측모델을 개발했다. 또한 모든 의료기관이 동시에 완전히 정보화 되고, 관련된 모든 법제도적 개선이 이루어졌다고 가정했을 때 비로소 성취가능한 잠재편익(potential benefit)을 계상했다.
미 의회 예산국은 입법적 목적의 경제성분석을 위해서는 잠재편익이 아닌 현실적 편익(likely benefit)을 계상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적하며 랜드보고서에 부적절 판정을 내렸다. CITL 보고서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판정했다. 연구자의 장밋빛 미래예측과 현실의 경제성분석에는 차이가 있다.
긍정적 편익은 주로 Kaiser Permanente와 같은 Integrated Delivery System(IDS)에서 보고됐고, 개별 병원은 그렇지 않았으며, 개원가는 오히려 비용이 증가했다. HMO와 배타적 계약 관계인 IDS는 환자의 의료이용을 줄일수록 비용이 절감되는 인센티브 체계를 갖고 있어서, 환자의 방문최소화를 통해 비용절감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나머지, 특히 행위별수가 체계가 적용되는 의료기관에서는 오히려 의료비용이 증가할 소지가 많았다. 앞서 Chaudhry 등의 연구에서처럼 그동안 긍정적인 편익은 주로 네트웍형 대형 의료기관 네 곳에서 보고됐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았으며), 이들 소위 ‘academic research champion’들은 수십 년 동안 정보화 투자를 계속하며 시스템과 함께 진화해온 기관이다.
결국 의회 예산국 보고서의 결론은 “정보시스템 자체만으로는 편익이 발생하지 않으며, 이는 관련된 법제도, 인센티브 체계, 조직문화적 특성에 필요한 모든 변화가 함께 수반되었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세계 최대의 IT 프로젝트’를 주창하며 2002년 국가전략기획(ISP)을 배경으로 야심차게 시작한 영국 NHS의 국가보건의료정보체계 NPfIT 구축 사업은 이미 심각한 지연과 실패 위협에 직면했다(Clegg and Sheperd, 2007).
처음에는 예산 4조 6천억원 구추기간 3년으로 예상했으나, 2006년 6월 영국 의회 회계국의 재추정 결과 예산 25조원 기간 10년으로 불어났다. 2007년 4월 영국의회 공공회계위원회(PAC)는 175쪽의 보고서에서 결국 4배에서 7배 이상인 40조원 투입에도 불구하고 사업성공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결론내렸다. 위원장Edward Leigh는 NPfIT를 ‘세계 최대의 IT 프로젝트’가 아닌 ‘세계 최대의 재앙’으로 규정했다.
의료정보화는 전봇대를 뽑듯이 한 몫에 해결될 사업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여정이 정해지지 않은 긴 여행과 같은 것이다. 정보시스템은 의료-사회문화와 함께 진화해 가는 것이다.
잠재적 가능성들이 언젠가는 실현되겠지만 현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서두르기보다 환자 안전과 진료 향상을 보장하는 검증과 질 높은 시스템이다. Simborg 박사(2007, JAMIA)의 말처럼 “속도를 늦추더라도, 대규모 투자에 앞서, 생각을 다시 한 번 해 볼 시점”이다. 정보시스템의 도입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앞서가는 ‘챔피언’들은 도전정신으로 난마와 같이 얽힌 문제들을 하나씩 규명하고 해결해 갈 것이다.
따라가는 기관들은 기관별 비전과 현실에 맞고 검증된 시스템 도입과 발전계획 수립이 필요하다. 정부로부터는 시스템 표준을 임의로 재단하거나, 서둘러 과도한 메가프로그램을 추진하기보다는, 사회경제적 인센티브와 법제도, 사회문화적 환경의 지속적 개선을 도모하고, 연구개발과 검증을 위한 장기적 안목의 지원을 통해 ‘인간의 얼굴을 가진 정보체계 구축’을 이끌어 줄 것을 절실히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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