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전(17일) 발표되었던 의협과 보건복지부의 협상안을 두고 장외 논쟁이 뜨겁다. 특히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이하 건정심) 인적 구성 개편을 놓고 의협과 보건복지부의 주장이 크게 엇갈린다.
협상안에 있는 건정심 공익위원을 가입자와 공급자 대표들이 동수(同數)로 추천한다는 문구를 두고, 의협은 공익위원 8인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하나 보건복지부는 정부와 산하기관 4인을 제외한 나머지 4인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그 진위는 차치하고서라도, 설령 공익위원 4인에 대한 추천권을 얻어오더라도 어떤 큰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다. 국민건강보험법 시행령 제6조 4항에 의하면, 건정심의 표결 결과가 가부(可否) 동수이면, 위원장(보건복지부 차관)이 정한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반 집 차이로 지나, 만방으로 지나 똑같이 바둑 한 판 패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 건정심의 의결 구조에 대한 이의제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 2006년에는 가입자들이 공익위원들의 의료수가, 보험료 중재안에 반발하여 표결 직전에 집단 퇴장 한 바 있었고, 2007년에는 의협과 병협이 그러했다. 그 전 2003년에는 공급자 6인이 퇴장하고 가입자 2인도 표결에 불참한 적도 있었다(자세히 찾아보면 사례가 더 있을 것 같다).
요컨대, 이는 건정심 구조 자체의 문제다. 지금처럼 공익위원 8인 중 정부와 산하기관 4인이 들어가고 나머지 4인도 보건복지부가 추천하는 이상, 가입자와 공급자들이 유혈 낭자하게 싸워봐야 결국 정부가 의도한 대로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건정심 인적 구성 개편안은 국민건강보험법 제4조를 개정해야 이뤄진다.
그런데 협상안이 국회로 가면 정부 측에 유리하게 흘러갈 수밖에 없다. 국회의 다수를 차지한 여당은 아무래도 정부의 입장을 두둔할 것이며, 야당 역시 가입자는 물론 시민단체 등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보면 세월이 흘러 유야무야 폐기되거나 정부 측에 유리하게 입법되기 마련이다. 보건복지부로서는 국회의 법률개정 사안은 손 떠나면 그만인 아주 즐거운 일이다.
이쯤 되면 눈치 챘겠지만, 건정심의 본질적인 문제는 인적 구성이 아니라 의결 구조다. 무늬만 '공익(公益)'인 정부 측 8인이 표결에 참가하고, 가부동수인 경우 위원장까지 가세하는 표결 구조에서는 절대로 의료계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여기서 공익 8인을 모두 가입자와 공급자가 동수로 추천을 한다는 법안이 통과되기도 어렵거니와, 만일 그리 된다고 해도 위원장이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면 그걸로 끝이다.
하지만 대안은 있다. 건정심 인적 구성을 바꿀 필요도 없다. 위원 구성은 그대로 두고 정책을 심의하되, 표결만 가입자와 공급자만이 하도록 바꾸면 된다.
이는 국민건강보험법 개정 사안이 아니다. 시행령 제6조만 바꾸어서 가입자와 공급자 위원들만 표결에 참가하게 하면 된다(의결 정족수 개정).
정히 모든 사안에 있어 공익위원들의 표결 배제가 곤란하다면, 최소한 의료수가와 보험료에 관한 안건만이라도 가입자와 공급자가 1:1로 표결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는 국무회의를 거쳐 대통령령으로 개정하면 되므로, 정부가 약속하면 국회에 떠넘길 수도 없는 것이다.
혹자는 상호 이해관계가 종종 첨예하게 부딪히는 공급자들이 단합하여 가입자들과 표결로 붙어볼 수 있겠느냐고 할지도 모른다. 허나 지금껏 건정심 내의 공급자들이 단합이 잘 되지 않았던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우리끼리 단결해봐야 어차피 표결에서 깨지므로 단결보다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표결 구조만 바꾸면 희망이 생긴다. 몇 번 치열한 의결로 싸우다보면 자연스럽게 협상과 표결의 노하우를 터득하게 될 것이다. 가부동수로 계속 흘러가다보면, 한 발씩 양보하는 절충점을 찾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건정심 의결 구조를 바꾸자는 주장과 노력은 많았지만, 이미 손잡이로 칼을 잡은 정부가 이를 들어줄 리 만무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14년 만에 모처럼 회원들의 투쟁 열기가 뜨거운 지금, 건정심 표결 구조를 개선함으로써 불합리한 수가결정 구조를 단번에 바꿀 수 있는 호기를 잡은 것이다. 이는 정부가 시행령만 개정하면 되는 것이므로 국회나 다른 이유를 댈만한 핑계거리도 없다.
건정심 위원 구성은 지금 이대로라도 상관없다. 보건복지부는 즉시 시행령 개정안을 국무회의에 상정하라. 그것만이 지금 의사들의 분노를 이해하고 달래고자 하는 정부의 진정성을 확인해주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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