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6시. 마지막 외과 병동 당직이 끝났다. 꼭 한 번은 돌아야 하는 일반외과 인턴은 모두가 돌아야 했기에 불만 없었지만 큰 난관이었다.
일반외과 안에서도 분과 별로 난이도는 상이했지만 전체적으로 다른 과에 비해 힘든 일정이었다. 편하다는 병동 인턴마저 외과 병동 인턴은 힘들었다. 당직은 끝났지만 이제 곧 아침 6시로 넘어가는 정규업무가 시작된다.
본원은 외과로 성장해 수술 잘하는 병원으로 명성을 날린다. 지금도 언론에 비춰지는 본원의 모습은 외과가 특출한 병원이다. 암 수술 잘하는 병원, 장기이식 잘하는 병원 등으로 알려져 있다.
종합병원은 보통 내과가 강세를 이루며 중심을 잡고 외과가 그에 맞춰 수술을 진행하는 분위기이지만 본원은 외과가 중심이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타교에서 온 동기들은 이 병원이 외과를 키워 지금의 명성을 쌓고 체계를 구축한 전략이 대단하다고 말했다.
그런 외과였기에 환자 수는 의사 수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정말 빠듯하게 의료진 운영을 하고 있어 녹록치 않은 외과 인턴이었다. 내과 인턴일 때는 담당하는 병동이 하나였는데 외과 인턴이 되니 담당하는 병동이 3~4개였다. 당직을 설 때면 7~8개의 병동을 한 번에 도맡아야 하는 고비에 봉착했다.
짬도 없이 일해서 밤 12시가 되어 겨우 당직 일을 끝마쳤다는 이야기. 6시간 넘게 온 병동을 돌아다니다 몸을 잠시 누인 사인 어디론가부터 콜이 울리고 새벽 3시 반에는 간이식 병동의 채혈을 시작하는 곳이 외과 병동 당직이었다.
가로 길이 300미터는 족히 되는 병동에서 병동으로 걸어다녔다. 일하는 시간의 반은 걷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데 쓰고 있을 정도였다. 심심찮게 남자 인턴들도 압박 스타킹을 신고 일했다. 당직이 끝나고 나면 다리가 퉁퉁 부어 헐렁한 신발이 꽉 끼었다.
학생 때는 큰 병원에서 배우고 일할 것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잠을 못 자고 다리 아프게 병동을 돌아다녀야 할 때는 병원 크기가 참으로 야속했다. 외과 병동 인턴을 마치고 나면 대부분 이 병원은 너무 크다며 푸념을 했다.
5분 간격으로 계속 콜이 올 때는 미칠 지경이다.
“선생님 ○○○병동인데요, 여기 채혈이랑 심전도 있어요. 언제 오실 수 있으세요.” 적어놓지 않으면 금방 잊어먹고 일을 마쳤다고 안도하는 사이 다시 콜이 온다.
“선생님, 아까 전화드렸는데 잊으신 건 아니시죠? 빨리 와주세요” 하는 콜의 노예가 되어 있다.
그래도 외과 입원 환자들은 좋았다. 암 수술 환자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인턴이어도 의사의 말이라며 잘 따라주었다. 더군다나 시골에서 평생 농사만 짓다 오신 할아버지, 할머니는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지유” 하고 웃는데 그 모습이 귀여웠다.
내과 환자들의 경우 당뇨, 결핵, 고혈압, 만성 신부전 등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오랜 투병 생활과 지긋지긋한 병원 생활 때문에 협조가 잘 안될 때가 많다. 이미 오래 병원 문턱을 드나든 환자들은 인턴이 의사가 아니라 인턴 나부랭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에 비해 외과 환자들은 수술을 위해 처음으로 종합병원에 입원한 경우가 대다수다. 협조도 잘 되고 잘 따라주어 편할 때가 많다. 무엇보다 혈관이 좋아 채혈할 때 부담 없는 것이 인턴 입장에서 가장 좋은 점이다.
인턴을 하는 내내 150명이 모두 이탈 없이 함께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 달은 동기 한 명이 퇴사하는 바람에 남은 4명이서 5명의 일을 나누었다. 그만큼 당직 서는 날도 하루씩 늘어났다. 36시간 일하고 12시간 쉬고 다시 36시간 일하고 12시간 쉬는 ‘퐁당퐁당’의 일정만큼은 반갑지가 않다. 몇 번의 위기도 지나갔다.
간이식 병동의 채혈검사는 양도 어마어마하고 잦아 간이식외과 인턴의 일이었다. 하지만 응급 간이식 수술이 있는 날에는 병동 인턴이 잠도 못자고 그 환자들의 채혈까지 담당했다. 그런 날 당직은 2시간도 잘 시간이 없었다.
짬이 있으면 종종 들리던 인턴 라운지도 겨울로 접어드니 썰렁했다. 주로 잠자기 위해 오는 곳 정도로 이용될 뿐 봄처럼 다같이 모여 수다를 떨고 푸념을 늘어놓지는 못했다. 이미 익숙해진 인턴잡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실수담을 공유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한 번쯤은 겪어봤으니 수다 거리도 떨어졌고 몸의 피로가 더해지니 마음의 여유가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곧 전공의 선발 시험을 앞두고 있었기에 짬이 나면 기숙사에서 공부에 열공중인 동기들도 꽤 있다. 인턴 후반기에 들어가면 분위기가 바뀐다고 했었는데 휑한 인턴 라운지를 보니 체감할 수 있었다.
여전히 다들 지겹다고 칭얼거리는 인턴잡이지만 간간이 들리는 훈훈한 이야기들이 있어 좋다. 새벽 잠이 덜 깬 채 병동에 가서 채혈을 하려고 보면, ‘선생님 이거 드시고 힘내세요’라고 쪽지 붙은 음료수 한 병이 놓여 있다.
인턴이 해야 하는 일임에도 잠 깨우기 싫어서 대신 해주는 마음씨 예쁜 병동 간호사들이 있다. 가끔 일이 몰릴 때 동기끼리 도와서 한 번 훅 휩쓸고 나면 후련하던 그 기분도 좋다.
끝나는 달이 되니 다음 외과 인턴들의 세부 일정이 발표되었다. 악 소리 나는 생활을 체험하는 간이식 외과 인턴을 비롯해 버거운 일정과 비교적 쉬운 일정을 배정받은 인턴 사이에 희비가 엇갈렸다.
그렇지만 외과 인턴은 어디에 걸리든 녹록치 않으니 다들 또 고비를 넘기면서 한 달을 보낼 것이다. 병동은 인수인계할 내용이 별로 없다는 점이 유일한 장점 아닐까. “그냥 콜 오면 가서 하면 돼.” 어느덧 말턴끼리의 인계는 이 정도로 충분했다.
[47]편으로 이어집니다.
※본문에 나오는 '서젼(surgeon, 외과의)'을 비롯한 기타 의학 용어들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실제 에이티피컬 병원에서 사용되는 외래어 발음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 글은 박성우 의사의 저서 '인턴노트'에서 발췌했으며 해당 도서에서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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