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부가 필수의료 강화에 힘을 싣고 있지만, 의료계 내부에선 관련 정책의 근본적인 방향성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의료계 내부의 혁신과 대정부 투쟁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한 때라는 요구다.
20일 대한병원의사협의회는 대한의사협회 출입기자단 간담회를 열고, 지난 20년간 이어진 특정 학계 중심의 정책 설계가 필수의료 붕괴와 지역의료 위기를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병의협 주신구 회장은 현 정부의 보건의료 정책 문제가 단순히 특정 정권의 실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진단했다. 그는 지난 20여 년간 의료 사회학자들이 정책의 방향을 설계하고 보건복지부 관료들이 이를 구체화해왔다고 지적했다. 이런 정책 추진 방식이 정권 교체와 관계없이 유지되면서 필수의료 몰락과 지역의료 붕괴라는 총체적 위기를 낳았다는 분석이다.
주 회장은 현 정부가 추진하는 필수의료 강화 정책에 대해 다양한 입장과 대안을 이미 제안서 형식으로 발표한 바 있다고 설명했다. 구체적으로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의료인력 추계 기구 설치 ▲붕괴된 도제식 수련 시스템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수련 시스템 도입 ▲고의 또는 중과실이 아닌 의료사고에 대해 형사책임을 묻지 않도록 하는 형사사법 시스템 정비 등이다.
특히 의료비 절감만을 목표로 설계된 외국의 지불제도 시스템을 무분별하게 도입하는 것을 막고, 대한민국 실정에 맞는 현실적인 지불제도 개선안 마련이 필요하다는 요구다.
주 회장은 "지난 20여 년간 대한민국 보건의료 정책은 서울대학교 의료관리학 교실로 대표되는 의료 사회학자들이 설계한 방향을 복지부 관료들이 구체화 시키는 식으로 이뤄져 왔다"며 "이런 방향성을 가진 보건의료 정책이 성공적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여부는 필수의료의 몰락과 지역의료 붕괴로 대변되는 현 상황을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와 국회가 현장에서 일하는 의료 전문가인 의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대한민국 실정을 반영한 성공적 정책이 될 수 있다"며 "지금처럼 정부와 국회가 의료계 협조 없이 성공적인 정책 정착이 어렵다는 당연한 사실을 외면하는 한 필수의료는 살아날 수 없다. 대한민국 보건의료 시스템 전체는 계속 무너져 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의대 증원 사태 이후 병원 현장 상황에 대한 질문엔, 전공의 수련 중단으로 어려움과 봉직의의 번아웃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전공의 인력 이탈로 대학병원 교수들의 업무 부담이 가중되면서, 상당수 교수가 개원의나 2차 병원 봉직의로 이직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
더욱이 이런 의료 인력 이탈 현상은 수도권보다 지방에서 더욱 심하게 발생해 지역의료 인프라 붕괴를 가속하고 있다는 우려다. 병원 경영 측면에서도 지역 수련병원들의 경영난이 심각한데, 의료진 이탈이 봉직의 일자리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주 회장은 병의협 차원에서 교수를 포함한 봉직의 회원들의 번아웃 및 권익 침해 문제에 적극 개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궁극적으로는 각 단위 병원별 노조 결성을 최종 대책으로 삼겠다는 목표다.
그는 "각 단위 병원별 노조 결성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계획이다. 다만 지역병원 경영난 해결을 위한 대책은 병의협에서 직접적으로 나설 수 있는 부분이 없다"며 "그러나 앞서 제시한 의료정책 정상화를 통해 1·2·3차 의료기관들의 균형 있는 성장이 이뤄진다면 경영난이 해소되고, 이로 인해 양질의 봉직의 일자리도 많이 창출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의료계에서 소외됐던 봉직의 직역에 대한 지원과 권익 보호 필요성도 강조했다. 현재 대한의사협회 회원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직역이 봉직의라는 이유에서다. 이는 의료계 내부 구조가 변화했다는 의미라는 것. 의료계 역시 이런 변화에 따라가야 한다는 요구다. 또 병의협 역시 봉직의를 대표하는 유일 단체로서 역할과 위상이 더 높아져야 할 것으로 봤다.
또 그는 병의협과 의협 집행부의 관계에 대해 정관에 규정된 동반자이자 협력 관계임을 강조했다. 다만 의협 집행부나 대의원회가 회원 이익에 반하거나 종주 단체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할 경우 이를 지적하고 올바른 방향을 조언할 것이라고 밝혔다.
과거 주 회장은 의협 집행부의 투쟁 방식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 바 있는데, 앞으로 지속될 의료계 투쟁을 위해선 투쟁에 적합한 조직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제언이다. 또 이를 위한 가장 확실한 대안은 의사노조라고 강조했다.
의협은 하루빨리 준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관련 노하우가 있는 병의협과 기존 의사노조 집행부를 중심으로 전국의사노조 결성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요구다.
그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의협은 투쟁이라는 특수 상황에 제대로 대처해나가지 못했다. 새로운 집행부가 들어선 지 1년이 됐지만, 의사들에게 불리한 현안들이 몰려오고 있다"며 "의협이 전략적이고 발 빠르게 움직여 회원들의 의식화를 이뤄내고, 단합된 힘을 이끌어 강력한 투쟁 동력을 마련했다면 투쟁의 결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짚었다.
이어 "기본적으로 의협 조직은 투쟁에 적합하지 않다. 앞으로도 지속될 의료계 투쟁을 위해선 여기에 적합한 조직이 만들어져야 한다"며 "현재 국회에선 의사들의 단체행동을 사실상 완전히 틀어막는 법안마저 만들어지고 있다. 의사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 수단은 법이 단체행동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노조를 통한 쟁의행위뿐"이라고 강조했다.
의료정책에 대한 의료계의 주장이 국민에게 충분히 전달되지 못하는 상황과 관련해선, 의사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답했다. 의사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점을 부각하고 정부 정책의 잘못만을 비판하는 방식으로는 국민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효과적인 대국민 소통을 위해선 철저히 국민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를 알아듣기 쉽도록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는 설명이다.
일례로 그는 대체조제 간소화의 문제점을 주장할 때도 국민 건강 악화라는 당연한 주장만 반복해선 안 된다고 짚었다. 처방받은 약이 환자 동의 없이 다른 약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국민이 동의하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
이에 더해 국민이 처방받은 약을 어디에서 조제 받을지 선택할 수 있는 제도의 필요성 여부를 함께 물어, 국민의 목소리를 국민에게 되돌려주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판단이다.
주 회장은 "병의협은 자체적으로 10월 초 연휴 기간부터 여론조사를 기획했다. 국내 공신력 있는 업체를 통해 조만간 대국민 여론조사를 시행할 예정이다. 그 결과를 국회와 언론에 제시하겠다"며 "소통의 관점에서 의사들은 기존의 전문가 주의를 잠시 내려놓고,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과정을 통해서 충분한 신뢰를 쌓아나가다 보면, 결국 의사들에 대한 국민의 신뢰감이 두터워지고, 이는 결국 의료계의 주장이 더욱 힘을 받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주 회장은 병의협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람직한 의료 시스템에 대해 "특정 직역의 희생 없이도 지속 가능하고, 국민이 안전한 시스템"을 제시했다.
의사에게 보편적인 윤리 수준보다 높은 윤리의식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에 불과하며, 희생이 아닌 시스템 그 자체의 힘으로 유지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제언이다. 이런 시스템이 올바른 의료라는 인식이 모든 정책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
또 이를 위한 핵심적인 선결 조건으로, ▲'정가'가 아닌 '원가'를 적정 수가로 인식하는 정부 태도 ▲의사를 대거 충원해 강제 지방 근무를 시키면 지역 의료가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 ▲공공 의대 설립으로 강제 봉사를 시키면 공공 의료가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발상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촉구했다.
주 회장은 "지금 이 시간에도 의료 현장을 지키면서 국민 건강을 책임지고 있는 봉직의 회원 여러분의 노력과 헌신에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하지만 점점 이 땅에서 의사로 생활하는 일이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앞으로는 나와 내 가족, 그리고 국민의 건강을 위협하는 온갖 위협에 맞설 수 있도록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관심과 참여가 결국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을 바꾸고, 보다 나은 나의 삶과 국민의 삶에 기여하게 된다는 점도 잊지 말아달라"며 "병의협은 앞으로도 봉직의 회원들의 권익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면서, 대한민국에 올바른 의료 시스템이 정착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 해나갈 것임을 약속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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