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정부의 2000명 의대증원 정책 발표 이후 의료계는 1년 가까이 '코마상태'에 빠져 있다.
정부의 독단적이고 강압적인 정책 추진에 전공의 복귀는 멀어지기만 하는 상황 속, 환자들의 불편과 불안은 나날이 가중되고 있다.
메디칼타임즈는 2025년 신년 좌담회를 열고 탄핵정국 속 의료계 향방을 논의했다.
이날 좌담회엔 고대안암병원 박종훈 교수(한국병원정책연구소장), 세종충남대병원 김현정 교수,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조원준 수석전문위원, 유미노의원 민호균 대표원장(대한개원의협의회 정보통신이사, 대한외과의사회 보험이사)이 참석했다.
■ "정부, 환자 배 가르고 수습 어려우니 도망간 꼴…의료개혁 실패 인정하라"
의료 전문가들은 의료계와 정부의 갈등 해결을 위해 정부가 현 상황을 정확히 진단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민호균 원장은 현 의료계 상태를 사망 직전의 환자에 비유하며, 목숨만이라도 부지할 수 있도록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민 원장은 "전문의는 수술을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언제 수술을 멈춰야 하는지 아는 것 또한 중요하다"며 "이 환자의 수술을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판단하고 멈출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의대증원 등 이번 정부의 의료개혁은 칼을 대면 안 되는 아픈 환자을 수술하겠다고 배를 열고는 집도의가 떠나버린 것과 다름없다"며 "치료를 못 했던 이유가 있는데 이를 모두 무시하고 수술을 시작해 환자 상태가 급속도로 악화되고 수습이 불가능해 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는 지금도 수술이 성공할 것이라 얘기하며 의료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이미 실패했다"며 "지금은 수술을 성공시켜야 할 상황이 아니라 하루빨리 배를 닫아 환자 목숨이라도 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포고령에 '전공의 처단' 내용이 포함된 것에 대해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윤 대통령이 지난 3일 기습적으로 발표한 계엄 포고령에는 48시간 내 복귀하지 않는 전공의를 포함한 의료인은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민 원장은 "계엄령이라는 국가 정책에 '전공의'라는 특정 직역을 올린다는 것 자체가 지나친 행정력"이라고 "이 부분에 대해 국가가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전공의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전공의들은 돈이나 처우 문제 때문에 떠난 것이 아니었다"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부의 거칠었던 정책 추진 방식에 대한 인정과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것에 대한 사과"라고 강조했다.
박종훈 교수 역시 이에 동감했다. 박 교수는 "전공의가 가장 바라는 것은 의대증원 철회"라며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정부가 상황이 이렇게까지 악화된 것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견해를 밝혔다.
조원준 수석전문위원은 계엄령에 전공의가 포함된 것은 극소수의 인식일뿐, 이를 정부와 정권의 입장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계엄 포교령에 등장한 전공의 처단 내용을 정부와 정권이 모두 동의했을리 만무하다"며 "매우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발표됐기 때문에 어떠한 특정 집단의 인식이 반영됐다고 해석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 의사 보복 위해 의료악법 발의?…"국민 공감대 고려해야"
이날 좌담회에서는 의정갈등 수습 이후 의료계에 불리한 일명 '의료악법'이 쏟아지지 않을까에 대한 우려도 논의됐다.
실제 지난 2020년 문재인 대통령의 의대증원 추진 당시, 갈등이 수습된 이후 간호법과 면허박탈법, 비대면진료법 등 의료계 반대가 심했던 여러 법안이 발의된 바 있다.
하지만 조원준 수석전문위원은 윤 정부의 의대증원 정책은 의료계뿐 아니라 국민마저 설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보복성 법안이 발의될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했다.
그는 "의사들은 사회에서 힘이 없다고 이야기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며 "기득권 집단이기 때문에 정치권도 상당히 눈치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그 고리가 약해지는 특정 시점이 있다"며 "정치권은 대체적으로 다수의 국민들의 여론에 맞추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국민 정서가 모아져 사회적 압박이 강해질 때"라고 설명했다.
2020년 의대증원 추진 당시에는 전공의들이 일시적으로 응급실까지 자리를 비우며 환자를 버렸다는 국민들의 정서적 반감이 강해졌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조원준 수석전문위원은 "윤석열 정부의 의대증원 정책은 국민들 역시 문제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며 "국민들은 지금도 여전히 전공의에 대한 반감은 있지만 일방적인 정권의 폭력성에 대한 공감도 크다"고 주장했다.
이어 "의정갈등이 길어지며 국민들도 불안감이 높아진 상황"이라며 "의사들이 환자를 버렸으니 혼내줘야 한다기 보다는 같이 살고 보자는 경향이 더 큰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같은 법안이라도 의료계는 '의료악법'이라고 규탄하지만, 환자 입장에서는 필요한 법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조원준 수석전문위원은 "의료계는 의료악법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지만 다른 곳에 가면 동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의료계 입장에서는 정부가 국회가 어떻게든 의사의 권한을 제한해 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하는 정서적 반감이 있지만 반대편에서는 환자의 권리를 강화하는 법이라고 얘기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같은 법을 두고 환자와 의사가 서로의 권리를 상충한다고 인식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의료악법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의사 때려잡기 법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지고 논란이 되지 않을 일도 논란이 된다. 이러한 기조를 바꾸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종훈 교수 또한 "의료계는 악법이라 얘기하지만 국민적 정서로 보기에 공감할지 의문"이라며 "2020년 집단행동 이후 정부가 의사단체에 보복하기 위해 여러 법안을 발의했다고 보지 않는다"고 견해를 밝혔다.
이어 "의료단체의 큰 문제 중 하나는 어떠한 사안을 두고 국민의 시선에서 보는 것에 굉장히 인색한 것"이라며 "행정부는 언제든 여러 안을 구상하고 있으면서 사회적 분위기를 보고 법안을 던진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의료계가 좀 더 현실을 잘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 "전공의 돌아오지 않는다…의료체계 방향 재고해야"
끝으로 의료 전문가들은 의정갈등이 장기화될수록 결국 가장 큰 피해는 환자에게 돌아간다고 강조하며, 하루빨리 특단의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이를 위해 정부뿐 아니라 의료계 또한 적극적으로 대화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
김현정 교수는 "지금은 의료진 중 누구도 앞에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나가려 하지 않는 상태 수동적 공격 성향이 심각하다"며 "이러한 경향을 보이는 패시브 어그레시브(Passive Aggressive)의 끝판왕이 바로 젊은 의사들"이라고 강조했다.
'패시브 어그레시브(Passive Aggressive)' 성향이란 적대감이나 공격성을 소극적이고 교묘하게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직접 대면으로 나서지 않고 간접적으로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것.
김현정 교수는 "과거 의약분업 당시에는 의사들이 나서서 전단지를 돌리고 데모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다"며 "하지만 지금는 아무도 나서서 얘기하려 하지 않는다. 학생들이 가장 심각하지만 대학병원, 개원가 모두 마찬가지다. 안 될거야 라는 생각에 각자도생하는 분위기가 만연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현 상황이 지속되면 결국 그 피해는 환자에게 돌아간다"며 "하지만 의정갈등이 지속된 1년 동안 그 어떤 사람도 국민들이 지금과 같이 세계 최고의 의료를 누릴 수 없다고 현실을 지적해주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박종훈 교수 또한 "현 상황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의료계가 정부와 대화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대화를 거부하고 의료계 주장만 계속 반복해서는 지금까지 늘 그러했듯이 최악의 결과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우려했다.
이어 "시간이 무한정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에 의료계도 조금 더 현명해져야 한다"며 "여야와 의료계가 현명한 방법을 찾지 못하면 내년에는 상급종합병원 진료가 필요한 중증 환자들이 적기에 치료받지 못하는 일이 현실로 나타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공의가 또난 현실을 인정하고 그에 맞게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민호균 원장은 "전공의가 빨리 복귀해야 하는데 이미 늦었다"며 "이 시점에서 국민과 정부가 한번쯤은 우리 의료체계가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해 분명하게 생각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국민들은 의사들이 사회적으로 특혜를 받았다고 하지만 환자 역시 저렴한 가격에 24시간 응급의료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특혜를 받고 있다"며 "진정한 의료개혁을 위해 의료보험체계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빨리 인정하고 비정상적으로 끌어왔던 체계를 전면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의사는 환자를 보고 위험할 경우 피해갈 수 있지만, 환자는 자신의 위험을 피해갈 수 없다"며 "의사가 잘못되는 것 보다 국민들의 건강이 더욱 중요한데 이미 위기는 시작됐다"고 지적했다.
조원준 수석전문위원 또한 "병원을 떠난 전공의들이 돌아오지 않는 것은 이제 국민들도 모두 알고 있다"며 "돈이 되지 않아 이동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면 여건을 바꿔줘야 한다는 공감대가 모이고 있다. 예산을 더 쓰더라도 정부가 필수의료 확충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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