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이 있느냐 없느냐는 '퇴근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함과 동시에 '잠을 잘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기도 한다. 응급이 있는 대표적인 곳은 일반외과, 흉부외과, 신경외과 등이다. 반대로 응급이 상대적으로 적은 곳은 피부과, 정신과, 영상의학과 등을 꼽을 수 있다.
응급이 아예 없는 전공과는 없다. 정신과도 자살 시도로 응급실로 내원하는 우울증이나 조울증 환자들이 있다. 바로 개입하지 않으면 자살로 이어질 수 있어 한밤중에도 정신과 진료가 이루어진다.
안과도 마찬가지, 녹내장으로 안압이 올라가는 경우나 사고로 안구가 파열되거나 각막 손상이 심한 경우에는 응급 수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하루하루 응급에 날이 곤두선 과에 비하면 횟수는 적다.
일반외과에도 언제나 응급은 도사리고 있다. 수술 이후 복강 내 출혈이 발생하는 경우는 발견하는 대로 한밤중에 수술을 준비한다. 맹장염이 터지면서 복강내 감염이 의심되면 수술을 곧바로 시행한다.
대장항문외과에는 또 다른 응급이 도사리고 있었는데 '장폐색증'이 바로 그것이다. 장폐색증은 쉽게 표현하면 장 움직임이 원활하지 않거나 장에서 항문으로 내려가는 통로가 여러 원인으로 막히는 것이다. 환자가 똥을 못 누거나 방구를 뀌지 못하는 경우인데 말초적인 표현이 더 빠르게 와 닿을 때가 있다.
"할아버지, 마지막으로 변 언제 보셨어요?"
"뭐라구?"
"할아버지, 화장실 언제 갔어요?"
"왜?"
"그러니까 할아버지, 똥 언제 눴어요?"
"으응. 똥 못 눈지 며칠 됐어."
장 안으로는 음식물이 소화되어 지나가기도 하고 공기가 지나가기도 한다. 우리가 숨을 쉬면 폐로만 공기가 들어가지 않는다. 식도를 타고 위, 소장, 대장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방귀는 장에서 꿈틀꿈틀 스스로 숨 쉬면서 공기를 내뿜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장이 막히면 당연히 음식물이 내려가지 못하고 공기도 내려가지 못한다. 이것이 점진적으로 진행되면 장폐색증이 된다.
장폐색증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소장이 막히는 흔한 원인은 수술 이후 유착이 생기는 경우이다. 대장의 경우 대장암에 의해 막히는 경우가 흔하다. 이 외에도 탈장이라 하여 복벽 틈새로 장이 삐쭉하고 튀어나오거나 장염전이라 하여 비정상적으로 장이 꼬이는 경우에도 장폐색증이 발생할 수 있다.
복부 수술을 하면 아무래도 장을 빼내어 서젼들이 살피고 만질 수밖에 없다. 추가적인 조작이라도 가해지는 경우에는 수술 후 장의 연동 운동에 장애가 올 수 있다. 피부에도 상처가 생기면 아물면서 흉터가 생기듯 복부 장기들도 잘리고 봉합되면 치유되면서 유착이 발생하기 쉽다. 장폐색증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더군다나 대장항문외과는 소장과 대장 그 자체를 다루는 과이다 보니 소장과 대장을 자르고 붙이는 일들이 주된 수술이다.
장폐색증으로 인한 응급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환자를 금식시키고 비위관이라 하여 코에서 위까지 들어가는 관을 삽입해 공기가 빠져나오게 하면서 보존적 치료로 기다릴 때도 있다. 하지만 보존적 치료에도 나아지지 않고 증상이 심해지는 경우에는 막힌 장을 풀어주는 응급수술이 필요하다.
"인턴 샘, 언제 응급수술 생길지 모르니 놀더라도 30분 이내 거리에서 노세요."
나에게 주어진 이동 반경은 30분 이내에 병원에 올 수 있는 거리였다. 주말에는 정규 수술이 없기 때문에 수술실 인턴은 오프다. 하지만 특이하게 대장항문외과 인턴은 자체 응급이 있기 때문에 놀더라도 30분 거리에 있어야 했다. 응급 콜을 받으면 30분 내로 병원에 복귀하여 수술 준비를 하고 스크럽을 들어가야 했다.
10월의 서울은 날씨가 쾌청하고 산책하기 좋은 날들 아닌가. 나는 응급으로 불려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토요일 오후 탈출을 감행했다. 올림픽 공원에서 따사로운 햇살로 광합성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 응급수술 있어요. 5시 20분까지 환자 수술장으로 내릴 테니 30분까지 수술방 들어가서 준비 좀 해주세요."
병원 기숙사에서 하릴없이 대기하고 있을 때는 응급 콜 없이 무사히 지나가는데 이렇게 차려입고 밖에 나올 때면 연락이 온다. 머피의 법칙도 아니고 인턴의 법칙인지 야속하게 콜이 울린다. 광합성을 시작한 지 30분도 되지 않아 다시금 병원으로 들어갔다.
장폐색증으로 인한 수술은 어렵지 않은 경우 대개 1시간 이내로 빨리 끝나기 때문에 응급수술 자체가 버거운 편은 아니다. 간혹 장유착이 너무 심한 경우 꼬인 장을 풀어주는 데 2~3시간이 필요하지만 드물다.
꼬인 부분을 풀어주고 필요하면 배 밖으로 우회로를 만들어주는 장루 수술을 한다. 장루는 막힌 부위 이전에 출구를 만들어 막힘도 해소하고 음식물이 항문으로 나아가지 않고 중간에 만들어진 출구로 나오게 만드는 일시적인 방편이다.
말초적으로 설명하자면 똥주머니를 배 밖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다. 장루로는 이후 소화된 배설물들이 나온다. 장루를 소독하거나 교체하는 경우에는 병실 안에 똥 냄새가 그득하다. 더러워도 어쩔 수 없다. 선생님들도 인정했다. 똥과 친해져야 하는 과가 대장항문외과라고.
장루는 평생 가지고 다녀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일시적인 조치일 때가 많다. 대장암 수술을 하면서 장루를 만들어 놓으면 암을 절제해낸 부위가 아물고 튼튼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그동안 환자는 장루를 통해 배설한다. 대장이 잘 아물고 나면 장루를 없애고 통로를 원래대로 복원한다.
급하게 장폐색을 해소하기 위해 대장암 수술전에 만드는 경우도 있다. 응급 수술을 목전에 앞둔 장폐색증 환자를 보면 빵빵해진 배 때문에 심한 통증을 호소한다. 청진기로 배의 소리를 들어보면 북소리가 나듯 쿵쿵쿵 하는 소리가 들리거나 아예 장 움직임이 들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응급 수술의 여부와 시기를 결정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X-ray나 CT로 사진을 찍어 확인하더라도 언제 수술할지는 환자의 증상 및 보존적인 치료에 대한 반응을 토대로 의사가 임상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보존적인 치료로 장폐색증이 해소되는 경우도 있으니 무조건적인 수술은 피해야 한다.
하지만 수술이 너무 늦어지는 경우 '장 괴사'라 하여 막힌 장들이 점차 시커멓게 썩어 들어갈 수도 있다. '장 천공'이라 해서 펑 하고 터져버리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꼭 필요한 순간에, 적정한 시기에 수술을 시행해야 한다.
한번은 장폐색증으로 다른 병원에서 트랜스퍼 온 환자가 있었다. 전신마비를 위한 금식 시간이 충분치 못해 기다리는 상황에서 결국 장이 천공되어 응급수술을 했다.
장폐색이 발생한 이유는 대장암 때문이었고 복부를 열어 보니 파열된 장 틈새로부터 변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집도하신 교수님은 연신 손으로 배 안에서 나오는 변을 퍼내고는 터진 부위를 찾아내고 막은 뒤에 장 절제를 시행했다.
수술하는 내내 수술실은 온통 똥 냄새로 진동을 했기에 교수님도 울고 마취과 선생님도 울고 스크럽 간호사와 나도 울었다. 무슨 수술인가 보러 온 선생님들은 헛기침과 함께 금세 자리를 떠났다.
수술이 끝난 후에도 섣불리 수술실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터진 장을 깨끗이 절제하고 복강 안이 더 이상 똥으로 묻어나오지 않을 때까지 세척했다. 똥 냄새는 여전히 진동했지만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다음 수술을 준비해야 했던 선생님들은 냄새에 봉변을 당했을 테지만.
오프에도 병원에서 30분 거리라는, 보이지 않는 반경 안에 갇혀 있는 것은 잔인하다. 하지만 압박을 받을수록 더 신나게 노는 법. 시험 기간만 되면 안 보던 뉴스와 신문이 재밌어 관심 없는 정치 경제란도 꼼꼼하게 읽는다.
응급수술 때문에 병원으로 들어가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갖고 있을수록 신나게 논다. 다행히 콜 없이 무사히 놀고 자의로 병원 기숙사로 돌아오면 그 사실에 감격한다. 그리고 밤새, 부디, 응급수술이 없기를 기도하며 잠에 들면 더 이상 욕심이 없다.
[44]편으로 이어집니다.
※본문에 나오는 '서젼(surgeon, 외과의)'을 비롯한 기타 의학 용어들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실제 에이티피컬 병원에서 사용되는 외래어 발음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 글은 박성우 의사의 저서 '인턴노트'에서 발췌했으며 해당 도서에서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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